최진영, <구의 증명>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죽음은 천둥벌거숭이의 황구였다. 생후 3개월이 조금 넘어 우리 집에 온 지 2주가 막 지난 어린 강아지였는데, 초등학생 어린 시절의 나에겐 참으로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강아지가 등교하는 나와 동생 뒤를 졸졸 따라오다 차에 받혔고, 그 길로 우리를 애처롭게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며 오던 길을 반대로 되짚어 한쪽 다리를 들고 급히 내리막을 뛰다 구르듯 집으로 내려갔다. 멀어지는 강아지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무서운 생각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나와 동생은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했다. 강아지를 따라 집으로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대로 등교했다. 그리고 방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강아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강아지가 피와 눈물을 흘리며 비명소리를 멈추지 못하고 아버지 앞으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집 마당에는 녀석이 쓰던 밥그릇과 물그릇이 아직 치워지지 못한 채 대문 안쪽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고모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대학의 과 동기 몇 녀석도 사고와 병으로 이십 대 중반에 목숨을 잃고. 수많은 죽음을 맞닥뜨리는 동안 나는 그 죽음을 먹고 이 자리에 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에 이 지구의 에너지에 총량이 있다면, 그 총량을 위해 태어나는 대신 죽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할 만큼 나는 그 죽음들에 묵묵히 동의해 왔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들을 빠르게 잊었다.
가수 “신해철”의 부고를 듣고 나의 그 생각이 너무 가혹하다 여겼다. 묵묵히 받아들인 그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정신 건강을 위한 도피 같은 것이어서 제법 부끄러웠다. 나는 평소 유명인의 부고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신해철의 죽음 뒤에 오는 슬픔과 상실감은 스스로도 놀랄 수준이었다. 나는 지금도 신해철을 생각하면 슬프다. 그 죽음이 나는 가졌던 사람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죽음이 더욱 오랫동안 내 뒤를 밟은 것은 내가 아마도 그의 음악을 많이 아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그의 음악을 더 많이 들었다. 그의 음악들 중에 처음 듣는 곡들도 오히려 그가 죽은 이후가 더 많았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는 여러 죽음들이 등장한다. 살고자 하는 내용으로 아우성치는데 그 모든 내용의 끝은 죽음이다.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비교적 담담히 읽혔던 이유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죽음이 삶의 결과는 아니지만 살아있음의 종착은 죽음이 정확하다. 그래서 죽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물리학자 입장에서 죽음은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김상욱 교수는 이야기했다. 나는 그 자연스러운 상태를 자연스럽지 않게 만드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가 떠난 후에 그를 기억하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최진영의 소설이 사랑과 관련하여 가장 정통한 이야기를 전개했다고 믿는다. 작가는 혐오스러울 수도 있을 '사람을 먹는다'라는 내용으로 죽음과 사랑 그 자체를 최대한 포장 없이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장면들이 모두 생의 의지와 사랑만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그 노래는 너무도 구슬프고 또한 강렬해서 읽는 내내 눈물을 훔쳐야 했다. 세밀하게 이어지는 묘사와 상황적 설명, 그리고 작가의 심도 있는 사고는 '나는 너를 먹을 거야.'라는 문장이 ‘나는 너를 영원히 마음에 둘 거야.’로 읽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묻고 짓이겨지고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없어 먹기라도 해야겠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행동인가. 쓰레기봉투에 버려지는 동물의 사체처럼 그의 몸을 건조하게 처분할 세상에 던져주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어떻게 사랑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주인공 '구'가 '담'에게 산골로 가서 청설모처럼 살자고 했을 때,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서로의 마음을 보았다. 이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라고 나타샤와 당나귀를 이야기하던 시인 백석의 시구가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온하고 안온한 순간에 우리는 사랑을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은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완벽하게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은 누구나 긴박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그 자신다운 선택을 한다고 믿는다. '구'와 '담'은 규정지을 수 없는 감정으로 오랫동안 함께 했으나, 함께 겪은 죽음들을 통해 비로소 그들의 관계가 명백함을 알았다. 그들 역시 주위의 죽음을 통해 서로가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것 같다. 서로의 상처를 묵묵히 견뎌주며 그들만의 세상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이 그들의 사랑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구'와 '담'이 실존하길 바라는 느낌이 들도록 생생하게 그들을 살려냈다, 그들의 사랑을 살려냈다.
선명한 필체의 최진영은 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죽음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누가 죽었을 때 가장 슬플까요.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관심이 없다. 태어날 때도 몸을 빌려 태어났듯이 죽을 때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몸이 마지막에는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생각한 지 오래다. 누군가에 의해 처분될 것이다. 그 처분이 조금은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도, 이제는, 없다. 나는 '담'의 마음과 같았다. 소설은 '담'을 통해 나 자신을 읽게 했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생각을 주워 담고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는지 깨닫게 했다. 나는 나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 반복되는 일상이 소란하지 않게 지나가길 바란다. 어떠한 흔들림도 없길 바란다. '담'이 '이모'에게 보인 마음과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끝없이 달라지지 않을 애정과 일상이었다. 일상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 속에서 '담'이 '이모'와 온기를 나눠가졌듯이 나도 끌어안고 온기를 나눠가진 가족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구'가 있다. 나는 나의 '구'가 죽을까 봐 오랫동안 노심초사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잠깐 나의 '구'가 감기라도 걸려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마음이 철컹하고 내려앉을 때도 있다. 이 주책스러운 마음을 나는 부끄러워 표현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제법 오래 눈물이 흘렀다. 단 한 사람, 그가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가 나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고 싶지 않다. 그가 나를 정리하게 된다면 내가 겪겠다 다짐하는 그 고통을 그가 대신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그를 기억하고 정리하고 그를 기억하는 최후의 일인이 되어 내가 끝끝내 살아남길 바란다. 그것이 그를 사랑하는 가장 고귀한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소설을 읽으며 자세를 고쳐 앉아 생각한다.
나는 '구'가 죽음을 통해 그의 사랑과 '담'이라는 존재를 증명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소진하는 일이어서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나의 죽음으로 타인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랑만으로만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구'의 죽음으로 '담'은 더 많이 '구'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으리라. 그래서 그는 더 오랫동안 살아남아 '구'가 세상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고, 그리고 '담'의 존재도 증명하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꼭 남기려 노력하듯이, 작가 최진영도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의 증명이 나의 증명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때 우리는 홀로 서 있지만 같이 서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글의 첫머리로 다시 돌아가 본다. 최초의 죽음을 기억하는 나는 그 황구를 증명할 수 있는 몇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릴 적 우리와 함께 자라다 먼저 세상을 떠난 황구도, 내가 커오는 동안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도, 아직 살아있는 내가 그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야겠다는 생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증명하는 최후의 일인이 되겠다는 다짐도 함께 잊지 않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올곧은 사랑일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