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런던, <마틴 에덴 1, 2>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강한 확신, 그 확신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바꾸고자 마음먹고 실제로 행하는 노력. 사랑은 사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끝이 파멸이거나 죽음일 수도 있다. 사랑은 간단치 않다. 사랑이었는지조차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하고, 사랑이었음을 부정하게 하기도 한다. 단순히 치기 어린 감정을, 그 깊고 강렬했던 순간의 감정을, 그러면 무엇이라 부를까. 부를 말은 따로 없다. 그저 사랑이다. 나로서는 '낯선 얼굴'의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이 얼굴을 바꿀 때마다 사랑일까 아닐까를 의심하는 나 자신을 고통에서 꺼낼 방법이 없다. 나는 사랑에 농락당한다. 한 번도 사랑에게 이겨본 적이 없다. 사랑은 나를 나의 바닥까지 밀어붙여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를 요구한다. 그 대가로 나에게 주는 것은, 단언컨대 없다. 사랑은 사랑으로 가득한 누군가를 잡아먹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므로 불멸한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의 시퍼런 에너지는 사랑을 결코 잠들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멸을, 나는 사랑한다.
잭 런던이라는 작가도 처음이고, <마틴 에덴>이라는 작품은 더욱이 들어본 적 없는. 다만 언젠가부터 관심이 생겼던 출판사의 책이어서 사두었다. 산 지는 일 년도 넘었지만 읽은 것은 최근이다. 조금씩 짬을 내어 읽었을 뿐인데도 두 권을 삼일 정도로 빠르게 읽게 될 정도로 문체는 유려하고 흡입력이 좋았다.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상황, 부르주아/평민(노예)의 구분과 그들 사이의 사랑, 그 사랑을 추동하여 벌어지는 남녀의 모습과 당시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는 '스펜서주의자'였을까.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조금은 연상되는데 검색해 보니 어느 정도는 맞는 모양이다. 조금 거슬리는 것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개인주의자'(조금 더 나아가면 제국주의, 인종주의에 맞닿아있는 위험한(!) 사상이다.)라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주인공 마틴 에덴의 생각이었다. 역자의 말을 빌려 이 책이 1920년대 경제 대공황만이라도 거친 후 발표되었으면, 작가가 이렇게 출간했을까 의심스러워지는 지점이 있긴 했다.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고 하더라도(그렇지만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사상적인 면이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사랑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개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탁월해서 어떤 문장은 여러 번을 읽었고, 귀퉁이를 접은 곳은 많았다. 특히 1권보다는 2권에서 더욱 속도감 있게 몰아치는 문장은 다음 책장을 기다리기 어렵게 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험악하고 거칠게 살아온 그의 계급(!)으로 부르주아적 교육을 받지 못한 마틴 에덴에게 안정적이고 부유하게 자란 부르주아의 딸 ‘리지'는 꿈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꿈에 닿기 위해 마틴이 해야 할 일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 그의 노력은 필사적이지만, 그녀는 그 필사적인 노력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없을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생명을 좀먹을 정도로 수면을 줄여가며 탐독해 나간 수많은 사상서들. 니체와 스펜서의 저작들.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은 적 없이 배를 타고 여기저기 떠돌던 부랑자 마틴이 접근하여 이루어내기에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믿는 사랑을 위한 이 도전에는 맹렬했다. 그는 단단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보다 더 단련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을 위한, 그의 노력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랑이 사람을, 그것도 옳은 방향으로 믿게 하는 곳으로 가게 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당연한 진리인 것만 같다.
“자기는 나를 사랑하지. 그런데 왜 사랑할까?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끔 하는 것이, 자기의 사랑을 내게로 끄는 바로 그것이야. 자기가 만났고 사랑할 수도 있었던 다른 남자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나는 회계사무소의 책상에 앉아 잔돈푼을 따지고 법적으로 티격태격하는 데 맞지 않아. 내가 그런 일을 하게 해 봐. 다른 남자들처럼 만들어서 그들이 하는 일을 하게 하고, 그들이 숨 쉬는 공기를 숨 쉬게 하고,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해 보라고. 그러면 자기는 다른 남자들과 나의 차이를, 나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해 버리는 거야.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이 나를 살아 있게 해. 내가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을 거고, 자기가 나를 남편으로 삼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잭 런던, <마틴 에덴 2>, 녹색광선, p.76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의도된’ 것이라면. 내가 그녀의 삶에 맞추는 것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지키는 것이 ‘맞는’ 방법이라면. 이들의 사랑은 ‘사랑’인가. 누군가의 ‘욕망’인가. 누군가의 ‘비겁함’인가. 또한 누군가의 ‘나약함’인가.
마틴은 작가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음을 스스로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애인 리지는 믿지 않았고 사랑을 확인한 후 마틴이 적당한 ‘일자리’를 잡아 자신과의 원만한(!) 결혼식을 올려주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틴은 그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 자체를 뛰어넘는 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갈 과거는 사라졌다.
지식의 광대한 영토로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도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패거리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 자신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부르주아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잭 런던, <마틴 에덴 2>, 녹색광선, p.191-192
과거는 이미 버리고 온 폐허이다. 사랑의 전후(戰後)는 이렇듯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내가 누군지조차 잊어버린다. 나는 그 폐허에서 다시 나를 찾고 나를 만들어야 한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여 재탄생해야 한다는 말을 속삭이곤 한다. 누군가를 강렬히 원해 본 적이 있다면,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평화는 없다.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버리냐, 버림받느냐만 남는다. 사랑은 재앙과도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리는 태풍,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도 같다. 대비할 수 있느냐, 없다. 자연재해에 제아무리 방비한다고 해도 크고 작은 피해는 반드시 있다. 사랑은 그래서, 불가항력이다. 막을 수도 따를 수도 없고. 사랑이 그것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주지도 않는다. 아름다움은 사랑에 있지 않다. 사랑은 투쟁 그 자체이다. (갑자기, 아리시마 다케오의 파격적인 책의 제목 <아낌없이 사랑은 빼앗는다.>가 생각난다. 이걸 어디에서 구해서 읽어야 할지.)
그래서였을까, 마틴의 재능을 알아본 ‘브리슨덴’은 ‘리지’와의 사랑이 풋사랑임을 주장했다. 마틴에게 멱살을 잡혀도 히죽거리며 할 말을 하는 눈빛이 문장을 통해 오롯이 그려졌다.
자네의 기쁨은 글을 써서 성공하는 데 있지 않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자네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지. 난 알아. 자네도 알아. 아름다움이 자네를 아프게 해. 아름다움은 자네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이고, 치유되지 않을 상처이며, 화염의 칼이야.
잭 런던, <마틴 에덴 2>, 녹색 광선, p.94-95
사랑이 끝나는, 그들의 종말을 보는 장면은 느릿하게 읽었다. 작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밀고 나갔으며, 어느 문장에서도 나에게 다른 시선을 둘 수 있을 여지와 틈을 주지 않았다. 어떤 상상도 어떤 이면도 허락지 않았다. 그대로 그들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수명이 다한 생명체의 날 것 그대로를 고했다. 고향과 집을 잃은 두 사람(아니 마틴 에덴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은 이제 어딘가에서 부랑할 것이다. 대체로의 사랑의 끝은 부랑할 것이 두려워 수명이 다한 것을 부여잡고 있는 썩은 내 진동하는 추악한 모습도 흔하다. 그렇지만, 마틴은 사랑 앞에서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 그 현실은 그녀와 자신의 현실적 계급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의 다행이랄까. 마틴은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알았던 것 같다. 아니, 지나간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법을 알았던 것 같다.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고요한 장례가 필요하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그를 이전의 세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과거를 잊었고, 그의 삶도 잃었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때로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목도하기란 여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다. 마틴은 진정으로 단단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랑으로 재가 된 과거의 폐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묻는다. 모든 형체가 해체된 자신의 몰골을 재조합하기 이전에, “일어선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꼭 일어서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사랑으로 해볼 수 있는 많은 것을 경험한 그는, 삶으로서도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맞닥뜨렸으므로. 더 이상 세상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바꿀 만한 더 좋은 사상도 찾지 못했으며(그는 사회주의도 신봉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을 혹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봐주는 세상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그의 명성과 글재주였고, 그를 오롯이 이해해 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인 브리슨덴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사랑의 끝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글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도,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나는 반추해 본다, 지난 사랑을. 그 사랑으로 나는 나를 얼마나 바꾸었나. 나는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해보았나.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다 알지 못한 세상이 있기 때문일까. '사랑의 끝이 절망이라 한다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은 나의 이십 대에서나 유효했다. 우리는 그럼에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살아가니까.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뜻하기도 하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마틴이 겪었던 사랑의 총량만큼을 겪어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허튼 생각을 해 본다. 사랑을 이길 수는 없다, 사랑은 불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필패의 싸움이다. 이 소용없는 단어에 생의 모든 것을 걸고 날름거리는 사랑의 혓바닥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 1920년대 현해탄 바다에서 정사(情死)했다고 알려진 작가 김우진이 “生을 위해 死를 바란다”(김우진의 시 <死(사)와 生(생)의 理論(이론)> 중에서 일부를 수정 인용) 고 했던가. 아니 나는, 死를 위해 生을 바란다. 그 위에 장렬한 죽음만이 허락되는 사랑을 바란다.
그에게는 과거는 없고 미래는 임박한 죽음이며, 현재는 삶의 모진 열병이었다.
잭 런던, <마틴 에덴 2>, 녹색광선, p.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