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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Oct 03. 2024

용기 낼 수 있는 사람이 어른.

체호프의 희곡<바냐 삼촌>과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그가 쓴 <바냐 삼촌>이라는 희곡에서 하나의 종교를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삼촌>의 어두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면서도 마지막에서 주인공 '소냐'의 독백 내용 때문에 이 작품을 비극이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체호프 자신도 희극이라 했다.)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 소냐의 독백을 한국 수어로 탁월하게 표현해 낸 것을 보면서 감독도 체호프의 생각에 강하게 동의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고, 영화에 등장하는 연극배우 역할의 주인공(가후쿠)을 맴도는 작품인 체호프의 <바냐 삼촌>을 읽었다. 희곡과 영화가 할 수 있는 교감이, 영화 안의 또 다른 극과 영화 안의 또 다른 레이어의 이야기들이, 여러 사건들이 동시에 전개되는 현대의 삶을 은유한다 생각했다.

어른이라면, 제대로 판단하고 상처를 받아야만 한다. 회피하지 않는 것은 용기다.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 그 상처 위에 꽃을 피울 수 있는 용기, 그리고도 남아있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일. 그 상처에게 고통의 이름을 달아주고, 충분히 아파해야만 한다. 회한이 남지 않으려면 충분히 사랑했어야 하고, 충분히 아파해야만 한다. 책임진다는 것은 피하지 않는다는 것. 오롯이 내가 안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삶을 일으키는 것.

면피하려 했던 시간은 언젠가 더 큰 파도로 삽시간에 내 삶을 삼킬 수 있다는 것을,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이었던 가후쿠는 아내인 오토가 죽고서야 알았던 것 같다. 사랑을 지키는 것에만 골몰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사랑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소유하려 할수록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지키려 할수록 지킬 수 없게 되는 역설.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만큼이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아내의 외도. 그녀의 변명 혹은 고백을 듣기 전에 그는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그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가후쿠의 삶은 말하지 못하는 아내와의 관계마저도 정리되지 못하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불편한 현실이 되어 유령처럼 떠다녔다. 그의 과거는 현재를 잠식했으며, 미래로 나아갈 의미를 잃게 했다. 그는 단순히 아내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자신의 두 손으로 죽였다는 착각에 휩싸인 채 남은 생을 살아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삼촌>에서 바냐가 남은 삶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부짖었듯이 말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미사키 역시도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라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그건 네가 잘못한 것이 맞는 것 같아." 라며 날카로운 말을 전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로 ‘위로’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위로이다. 체호프의 <바냐 삼촌>의 주인공 바냐와 동갑인 마흔일곱의 가후쿠는 어리지만 강단 있는 스물셋의 미사키에게 어른에게 ‘용기’는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용기 내어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달라질 것은 없고, 지나간 일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있는 '사람'으로서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그래서 폭삭 무너져 눈에 파묻힌 미사키의 집 앞에서 포옹으로 온기를 나누어준다. 각자가 겪은 과거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였다. 그 위로는 각자가 서로에게 선물하는 이국행 비행기 티켓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드라이브 마이 카>영화의 주인공처럼 혹은 체호프 희곡의 <바냐 삼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어른이 되었다고 모두 이룰 수 있는 것도, 이루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삶은 끝나지 않는다. 성취는 없고 소진되기만 하는. 무엇을 위한 소진인지 알지 못하며, 최악은 타인을 함께 소진시키는 일까지. 무의식적으로 무가치하게 시간들을 지나치게 된다. 그렇게 이어지는 삶 속에서 나는 성취라는 허튼소리를 집어치우기로 한다. 그리고 대체로는 어른이 되기 쉽지 않다는 말을 조심스레 내뱉는다. 그리고, 용기 내어 나의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세상을 받아들이고 관조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어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

(영화에서)가후쿠가 토해낸 (희곡의)바냐의 대사처럼 회한의 순간을 맞이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을까.

"내가 정상적으로 살았더라면 쇼펜하우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인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 희곡선>, 을유문화사, p.178


그렇지만 소냐의 마지막 독백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 희극의(비극이 아닌) 삶이 언젠간 끝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죽을 수 있을 때까지, 끝날 수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더라도,

모든 것들이 실패했다 낙담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용기 있게 서 있을 것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 무덤 위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노라고... (중략)... 비록 자신의 생애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했지만, 기다려요, 바냐 삼촌, 조금만 기다려요....... 우린 쉴 거예요. 우리는 쉴 거예요. 우리는 쉴 거예요!"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 희곡선>, 을유문화사 p.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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