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선 Sep 26. 2024

그렇다고 블랙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어요.

임솔아, <나는 아직도 거기에 있어>

“각자가 선 자리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이 문장을 자주 쓴답니다. 이 문장에서 저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돼요. 저는 언제나 혼자를 즐기고, 혼자의 시간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지만 누군가와 늘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의 에너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요. 그럼에도 사람과의 많은 교류에서 오는 피로감이 큰 저로서는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도 연대감을 가지고 혼자가 아니라는 맹세를 할 때, 제일 큰 에너지로 받아들여져요.


어릴 때는 자기 연민이 지금보다 백만 배는 더 컸던 것 같아요.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고통이 나보다 더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죠.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겠죠. 문제가 되는 건 그 생각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지게 될 때 일 거예요. 자기 연민이 백만 배 컸다는 것은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는 뜻도 되고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이 세상 안에서 어느 정도의 상황과 상태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전혀 파악이 안된다는 뜻도 되지요. 이 세상에 대한 이해도 없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으니 더 그럴 겁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하더라고요.


태어나서 성장한다는 것은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흰 드레스에 온갖 때와 얼룩을 묻히며 파티를 즐기는 일인것 같아요. 


원래 우리는 생각보다 무결한 존재였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세상에 ‘적응’한다는 이름으로 드레스에 묻은 때와 얼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과제를 부여받고 세상에 던져진 게 아닐까요. ‘적응’은 아름답고 이쁜 과정이 이어지지 않아요. 처음에는 드레스의 얼룩을 받아들이지 못해 숨기려는 시도도 있을 것이고, 숨기지 못해 모든 것을 그만두어야겠다 포기하는 순간도 있겠지요. 그리고 얼룩을 지워보려 무수히 많은 노력도 할 것이고요. 그렇지만 나는 알았어요, 그 얼룩은 절대 지워지지도 않고 더 큰 얼룩이 되더라는 것을요. 어떤 얼룩은 지워지기는커녕 더 크게 번지기도 하고 더 재수 없으면(!) 얼룩 묻은 그 부분의 드레스가 헤어지고 찢어지기도 하더라고요. 나는 왜 흰 드레스가 이렇게 더럽혀졌을까, 자책하는 순간부터 원래부터 흰 드레스가 아닌 건 아니었을까 자기부정하는 생각까지, 그야말로 생각의 대 환장 파티를 겪는 것만 같아요.


누군가는 찢어진 드레스를, 누군가를 허리에 푸른색 물감을 절대 감출 수 없는 드레스, 누군가는 불에 그을린 드레스, 누군가는 먹칠된 드레스, 그렇게 흰 드레스는 너덜너덜해지겠죠.


“모두의 드레스가 다 상했다고 해도, 나처럼 찢어진 드레스는 없잖아.”

이렇게 생각하던 어린 시간을 지나, 그 시간을 버텨오는 오래된 드레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 찢어진 드레스 말고도 불에 그을린 드레스도 시간의 궤적과 함께 개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게 되죠. 



임솔아의 소설,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는 전혀 다른 인물들의 일대기(!)를 보여줍니다. 임솔아의 소설에서 보이는 주인공들은 모두가 자신의 바다에 유유히 떠있는 조각배 같은 모습이에요. 연약하고 유약하기 이를데 없는. 어떤 부분에서 장애를 앓고 있거나, 어딘가 엉성해보이고, 부족해보이는 모습들 말이에요. 그들이 작은 전시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았을 였을거예요. 임솔아는 이 소설을 문학동네 잡지에 연재했다고 했습니다. 제목도 기존 기성의 작품(시)의 제목을 따오는 경우로 시작했어요. 연재하는 동안 이 인물들에 대해 깊이 파고들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성찰했겠지요. 그러했으리라는 짐작이 쉬이 가능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을 골랐지만, 조금은 더 힘들어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보였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저를 뒤돌아봅니다. 어느 켠에 저의 여섯, 열일곱, 스물하나, 스물아홉, 서른다섯. 이렇게 나는 어떤 나이에 나의 어떤 모습이 있었을까를 짐작합니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는지도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그 모든 것들의 총체겠지요.


소설에서는 그들이 결국 함께 서 있음을 말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고, 공통점이 없어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심지어 자주 만나지도 않을 사람들이지만, 각자가 선 자리에서 응원할 수 있으리라는 짐작이 갔습니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쉽게 파편화되었다고 이야기했지요. 직업도 너무 다양화되었고, 그에 따른 요구사항도 너무 다양하고 그러니 우리는 연대하기 어려울거라구요. 예전처럼 학생운동이 되지도 않을 것이고, 시민단체도 너무 많고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몫을 잃어가며 쓸쓸히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쉽게 만날거라고요.


그렇지만 소설가 임솔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남겨둡니다.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어요, 맞아요.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삶의 본질은 나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평범하게 우리의 일상을 그려나가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처럼 돌을 계속 밀어올리고 있을 거에요. 떨어지는 돌을 다시 밀어올리고, 또 굴러떨어진 돌을 밀어올리고. 


흰 드레스가 더렵혀진다고 블랙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흰 드레스에 얼룩만 남기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는 얼룩을 이어붙여 더 멋진 무늬로 탈바꿈 할 거구요, 누군가는 얼룩을 잘 도려내서 이쁜 미니드레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거에요. 아니 심지어 얼룩을 다른 무늬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어때요, 그 얼룩이 나의 무늬인걸요. 블랙 드레스는 아무런 얼룩도 없겠지만 아무런 무늬도 남길 수 없거든요. 모두가 블랙 드레스만 입는다면 나는 내가 아닐거에요. 우리는 흰 드레스를 입었기에 나일수 있어요. 나로서 존재하면 우리는 쉬울거에요. 우리, 이 자리에, 지금도, 있어요, 함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