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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Sep 12. 2024

살아가는 일 자체의 모순

양귀자, <모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소설일까. 오래된 책이 조금은 촌스럽지 않을까 생각하며 별 기대 없이 책을 폈다. 내용이 조금은 애매하고, 시의성에서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의미 없었고, 역시나 오래되었지만 126쇄를 찍었다고 표시되어 있는 책의 면지 내용을 보며 많이 읽히는 책의 위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많이 읽힌다고 무조건 좋은 책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이 읽힌 책이 좋은 책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역시나.


안진진이 생각하는 삶은 어때야 했을까. 이름부터가 진지하지 않길 바라지만 진지하고 고귀한 무언가를 언제나 마음속의 이상처럼 품고 있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이모는 안진진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누리고 있었다. 안진진은 이모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냉소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가 같을 수 있는 삶의 모순을 발견한 듯싶다. 안진진은 어린 나이임에도 어릴 때부터 모순을 체화하며 살았던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폭력과 가출을,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태도에 대해서도, 안진진은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그렇게 이모와 닮았다고 생각이 들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안진진은 쌍둥이 자매인 어머니와 이모의 모든 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주인공 안진진이 모순 그 자체였다. 작가는 안진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모든 인간의 창과 방패를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모순의 끝에 내가 가지는 감정은 모호이다. 모순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은 힘들 때도 많아서, 모순된다는 현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마음은 모호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나는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할까 늘 망설인다.


사람은 자신의 몸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닥뜨리고야 만다. 안진진이 결혼할 상대를 고르듯이.


이모는 죽는 것으로 자신의 다음 생에 대한 선택을 보여주었다. 산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이 안온을 더는 견디고 싶지 않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사실 약간은 이입이 되지 않았다.) 안진진은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선택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김장우에게 느꼈다고 결론 내리고도 나영규를 선택한 모순은 안진진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될지, 그 뒤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결국 사랑했던 사람의 그늘을 감옥이라 느껴 도망쳤다고 했다.(이 부분도 약간은 이해되지 않았다. 약간은 알듯도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과장된 설정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오고, 어머니는 그 사랑에 갇혀 아버지를 끝까지 돌보기로 한다. 어머니가 몸을 둔 곳은 결국 아버지이다. 모호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도 단칼에 자르듯 선택해야 하는 것이 삶이다. 이유를 댈 수 없더라도 어떤 것을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고, 그 선택 이후에는 이유를 만들기도 한다. 모순되더라도.


안진진은 사랑에 갇혀 도망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김장우와 가까워질수록 겁이 났던 걸까. 이모의 안온한 삶을 비꼬면서도 부러워했던 모습을 나영규와의 결혼을 통해 찾으려 했던 것일까. 안진진은 스무 살 중반까지 너무도 진한 삶의 무게에 파묻혀 밀도 있는 삶을 살아 그럴까. 자신의 치부를 모두 다 내보여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나영규에게 남은 시간들을 의탁하며 자신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꾸려가고 싶었던 것일까.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심심하고 재미없다는 뜻도 되지만 가장 편안하고 안심되기도 한다. 내가 결혼을 택할 때는 어땠을까. 내가 스물다섯의 안진진이라면 김장우를 선택할까, 나영규를 선택할까. 


나는 이모의 죽음이 삶을 지루하지 않게 할 대상은 그들의 아이들(안진진의 사촌들)이 아니라, 안진진이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한 이유는 이모의 영향일 것만 같다. 살아가는 일을 뒤집으면 죽음이다. 둘이 하나라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얼마나 모순되는 단어인가. 살아가는 일 자체가 어쩌면 모순 그 자체일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나이브한 표현인지. 얼마나 허약한지. 그럼에도 안진진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대로 삶을 내버려 둘 수가 없고. 모순되는 행동이어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진진의 마지막 선택이 나영규인 것에 독자들이 갸웃했을까. 그 갸웃하길 바라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 그 갸웃하는 행동을 통해 내 안의 모순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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