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결과물이 생명이라니!

고다 아야, <나무>

by 경계선

고다 아야, <나무>


1.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 ‘죽은 나무’와 ‘나무가 죽다’의 차이점.

사람으로서 죽어서도 누군가의 곁에 남아있는 방법의 최고는 예술이다. 그런데 죽고 난 이후의 기억과 망각에 대한 논의 말고, 생명과 다르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모호한 것은 ‘나무’ 같다. 그래서 나는 집의 모든 가구를 죄다 나무로 만든, 특히 원목으로 만든 것들을 고집하게 되었을까,라고 내 생각의 뿌리에 닿아본다. 나무를 죽이거나 혹은 죽은 나무를 자르고 가공하여 사람의 곁에 두는 이유는 겨울철 피부에 닿았을 때 차지 않고, 여름에 만졌을 때도 뜨겁지 않은 죽은 생명체라서 그럴까. 죽은 것이 맞겠지만, 나는 목재로써의 나무에서 한 번도 죽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을 보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무의식에 두고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2. 2024년 지난 한 해,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가 나에게는 최고의 영화!

영화의 여운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개봉 당시에 시간을 두고 세 번을 봤다. 그리고 한여름 갑작스러운 도쿄 여행에서 하루 일정은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 상’의 발자국을 찾아 검색하고 직접 그 장소들을 찾았다. 마치 영화 주인공이 거기에 살아있는 듯,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도시 한복판에서도 잔잔한 무위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내가 살아가는 복잡함을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는 위로가 되었다. 허구 속의 인물을 좇아 그의 취향을 탐색해 보는 시간은 어쩌면 미래의 나를 창조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래서 그를 좀 더 진지하게 좇기로 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가 즐겨 듣는 음악들을 사러 시부야의 타워 레코드를 들르기도 했으며, 그가 읽었던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라는 책도 교보문고 앱에서 찾기도 했다.(가까운 미래에 읽을 예정이다.) 동네 책방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았던 책들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영화 속 그가 알전구 하나를 켜 놓고 누워 돋보기 너머로 읽던 작은 문고판 책 ‘고다 아야’라는 작가의 <木(나무)>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 주문하여 문장을 훑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헌책방의 주인의 언급처럼, ‘저평가된’ 작가가 맞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작가 이름도, 제목도 모두 낯설었다. 작가가 1904년 도쿄 출생의 86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우리나라는 너무도 치열했으리라 생각하면, 또 우리나라에 일본의 문화에 대해 해금(!)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일본 작가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대체로의 남성 작가들 아닐까 싶고. 고다 아야 같은 여성 작가의 유작 수필집 정도를 출판할 여유는 없었을 것 같다. 아마도 작년 영화의 개봉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대중적으로 생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한다.


3. 나무에 천착하여 오래 생각하고 빚어낸 글을 더 오랜 시간을 들여 모으다.

오랜 시간이 걸린 생각과 글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 같다. ‘나무에 대한 사랑’이라고만 말하기에는 그녀의 문장이 너무도 단정하다.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역시나 좋은 글은 어떤 생각의 과정이지, 감각 가득한 문장을 이어 붙이는 것은 아니었다. 노년의 고다 아야는 13년 6개월이라는 세월 동안 간헐적으로, 그러나 잊지 않고 나무에 대해 탐구하고 시간이 되면 숲에 들어가 해설을 들었으며, 그 내용에 생각의 뿌리를 캐냈다. 조금씩 쓰고, 묵히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십 년이 넘어가는 것을 보며, 무언가를 꾸준히 오래 탐구하고 생각하는 일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가문비나무는 한 그루가 죽어 썩으면 그 자리에서 다른 가문비나무가 자란다는 과정을 발견한 작가는 거기서 오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의연한 필력으로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게 한다. 첫 장의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몰입감을 가져오게 해서, 나무에 관심이 없었더라도 혹은 나무가 아닌 다른 생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도 차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나무에 대한 필자의 애착은 군데군데 보이는데, 살아있는 나무와 목재를 구별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 구별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옳을지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죽은 나무에 대한 애정과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나무에 대한 구별도 남달랐다. 작가는 다른 나무를 길러낼 수 있을 정도로 부패하거나 썩어가는 나무들만 죽었다고 보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 위에 다른 것들을 길러내는 것이 죽음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죽음은 이토록 생명력이 강하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결과물이다. 작가가 홋카이도의 어느 숲에 닿았을 때, 추정하기로 삼천 년이 넘은 거목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일명 ‘윌슨 그루터기’, 1914년에 발견. 둘레 32미터, 지름 13미터) 근처에 수령이 이백 년이 넘은 삼나무들이 즐비했다.(책 85쪽 내용 수정 인용) 그 숲의 한가운데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삶일까, 죽음일까.


목재는 죽은 나무가 될 수 없다. 영원히 살아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 기온과 습도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하는 나무는 가공되어도 죽지 않는다. 글을 읽어갈수록 나는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를 구별할 수 없었다. 구별의 의미도 없거니와 구별할 힘을 잃어갔다. 목숨이 있다는 것과, 끊어진 목숨의 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무의 몸통과 뿌리를 구별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흙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은 나무이고, 흙 아래로 숨겨져 있는 것은 뿌리일까. 그렇지만 뿌리가 흙 밖으로 나와있는 수령이 천 년도 더 된 ‘야쿠 삼나무’를 보면서 필자는 고개를 갸웃한다. 부풀고 구부러진 힘줄 같은 오래된 나무들은 대체로 수려한 모습이라기보다 그 자체의 힘으로 ‘참혹한 인내심의 집약’(책 p.83)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 년이나 된 삼나무를 부러 찾아간 필자의 마음도, 그 삼나무를 만지고 바라보며 느낀 그 섬세한 마음도, 이 글이 내게 오게 된 긴 ‘아날로그적’인 시간이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던 고무나무가 목재가 된 후 우리 집 식탁으로 오게 된 과정과 같아서 마음이 묵직해졌다.(문고판 책을 침대에 누워 보고 있던 나의 침대 프레임도 인도네시아산 고무나무였다.)


4. 삶의 정수는 숲에 있는 것일까.

단정하지는 않지만 강건하다’(책 90쪽)고 보았던 오래된 수목의 모습에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멀쩡해서 수명을 다해 죽는다는 의식도 없이 생명을 끝마친’(책 120쪽) 숲 속 어느 한 곳에서 뿌리가 썩어가지만 넘어지지 않는 청량한 나무의 모습에서 작가는 삶의 정수를 길어 올린 듯하다. 도편수는 ‘죽은 나무’라는 표현보다 ‘나무가 죽었다’라는 표현을 쓴다며 나무와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함을 드러냈다. 자연사(自然死)라는 표현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죽음이 있느냐는 말과 함께. 그 죽음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작가도 그 ‘자연사’라는 표현에 동감하는듯했다.


나이가 어린 목수는 거대한 목재를 다룰 때 두려움이 생긴다고 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친 나무는 위용을 어깨에 걸고 있는데, 그 위용이 목수를 긴장시킨다는 것이다.(책 176쪽) 생명을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 목수는 나무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직업 같았다. 그렇지만 그 목수의 두려움을 걷어내고 담력을 키워주는 것도 결국 나무라고. 나무는, 알게 모르게 목수를 키운다고. 나무가 나무만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람도 키운다는 표현 같았다. 사람이 왜 나무를 가까이하고 싶은 것일까, 비스듬히 팔을 괴고 책을 덮은 후 나는 나무 책상에 앉아 졸고 있었다. 나무 책상이 아니었으면 나는 졸지 않았을 거라 핑계를 지어 본다.



5. 다시, 영화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 ‘히라야마’상은 왜 이 책을 읽었을까를 생각하며 책장을 덮는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도 읽었다. 그러고 보니 두 책 모두 제목에 ‘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히라야마는 영화 속에서 ‘코모레비(こもれび :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우리말 ‘볕뉘’와 유사)’를 찾아 시선을 두는 일이 많았다. 언제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점심 샌드위치를 먹었다. 도심 한복판의 작은 신사(神社)의 큰 나무가 그의 ‘도모다찌(ともだち : 친구)’라고 그의 조카는 사진을 찍어주었다. 내가 때로 등산을 가는 이유도, 산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름을 알고 싶어 졌던 이유도, 히라야마상과 같은 감정을 느껴서일까. 그런데 히라야마 상이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 말할수록 멍청해지고 뻔해질 그 재미없을 감정들일까. 나는, 어떤 내가 되고 싶을까. 나는 어떤 생명체가 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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