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
겨울이 시간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겨울 밖으로는 한 걸음도 상상할 수 없었을 때, 나는 러시아의 흰 눈밭과 그 눈밭에 구별되지 않을 새하얀 자작나무 숲을 상상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토의 땅을 떠올릴 때 함께 떠오르는 단어는 라흐마니노프나 차이콥스키 같은 음악가와, 독한 럼 같은 술, 푹 눌러쓴 양모 모자에 숨겨진 붉은 볼의 초록색 눈동자, 스크류바 같은 회오리 무늬에서 화려한 색감을 뽑아내는 바실리 성당이나 붉은 광장의 크렘린 궁전의 동글 뾰족한 건축물, 그리고 그 생경한 풍경들 사이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는, 혁명과 고통의 사상과 사유들. 나는 동양의 길도 서양의 길도 아닌 그 자체의 고민에 집중했던 19-20세기의 소련, 러시아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닥터 지바고>를 한껏 부푼 마음으로 읽었던 이십 대 중반의 나를 잊지 않는다. 그때는 작가 이름이 발음도 어려워 기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한참을 잊고 지난 지 십여 년이 되지 않아 작가의 이름을 발음이 꼬이지 않고 한 번에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가 남긴 시가 있다는 것이, 닥터 지바고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원래 시인이라는 것도 그때의 나에게 더 큰 발견이었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시집 한 권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숨겨진 에너지를 발굴했다. 발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도 이런 에너지와 생각이 있었다는 자각이 일어나게 하는 순간은, 글과 문장이 줄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러운 위로였다.
나는, 오장환과 임화의 시가 떠올랐다. 내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통사(痛史) 적 서술과 논문을 통해 머릿속으로 익혔다면, 그 시절에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은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임화의 <현해탄>으로 알았다. 그 시들을 통해 그때의 혁명과도 같았던 해방은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었던 보리밥보다 더 가끌거렸을 것이며, 음력 7월 어느 날의 정오 정수리를 치는 칼날 같은 햇빛 틈으로 이미 죽은 동지의 애끊는 슬픔을 감추는 시간이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붉은색 눅진한 녹이 베어나는 쇠줄같이 거친 질감의 시간을 나는 오장환과 임화의 시에서 감각으로 익혔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외웠던 역사 용어와 해방 이후의 사람들의 경제생활을 보여주는 숫자 정도는 잊었어도 오장환의 시집 제목이자 시의 제목인 '병든 서울'을 잊지 않았다. 김수영의 <가다오, 나가다오> (해방 이후 미국, 소련의 신탁통치를 비판하는 시였다.)도 같은 맥락으로 기억했다.
그래서일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다르게 다가왔다. 일생에 세 번의 혁명(1905년 혁명, 1917년 2월, 10월 혁명)을 겪으면서 그가 통과한 현실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거꾸로 <닥터 지바고>를 통해 상상해 본다. 그리고 알아챘다. <닥터 지바고>는 그의 자전적 소설이구나. 그가 살아간 시간이 이렇게 혼돈과 무자비였겠구나.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을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인 '유리 지바고'가 직접 쓴 시라 생각하며 읽었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닥터 지바고에서 흘러나왔던 그 평화로운 음악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렇게 뜬 세상이 네가 있어 하얀 분보다 하얘서, 나는 어떤 성공과 재앙보다 널 사랑했다.'(책 p.49)라는 문장에서 사랑의 종류는 얼마나 다양하고 깊이의 방향도 남다른가 생각한다. 혁명의 시간을 거쳐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없다. 혁명을 살다간 사람에게 개인이란 없다. 모든 생활이 세상에 잡아먹히고, 나의 모든 일상이 세상과 연동되는, 그 삶이, 그 세상이, 곧 나다. 나는, 그래서 분노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고 예전부터 생각해오고 있다. 정치 체제의 변화를 사회의 변화로만 생각하는, 역사는 조금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생활 그리고 조금은 위대한 조금은 무거운 것들이라고 생각해왔던 시간들을 반납하고 싶어진다. 모두에게 생활은 시대를 초월할 수 없고, 시대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이 시대는 결국 나의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현재 우리의 광장이 형형색색 빛으로 채워지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듯이. 이 분열과 극단의 세계에서 끝없는 시작만이 우리를 문명의 삶으로 남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그 시간을 버티고, 모두에게 자신의 혁명에서 비껴서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말한다. '참칭(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에게 붙이는 것)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책 p.234)라고 말한다. 내게 큰 목소리로 꾸짖듯 다가온 이 문장이 그는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후의 그의 태도가 그랬을 것이라 짐작한다. 유명해지려고 한 일이 아니듯, 유명해지는 일 자체를 경계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그의 삶을 통찰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혁명의 방향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쓴 시는 혁명에 바치는 내용들이 많아 더러는 달 뜨는 마음으로 읽었다. 언제나 조국으로 인해 난처한 상황을 겪었지만 조국을 버린 적 없었던 그는, 진정 분노하고 더 강렬히 사랑했으리라 생각한다. 권력의 힘에 의해 노벨상 수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력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또 그는 혁명에 대한 내용만큼이나 더 유려한 서정시를 써 내려갔고, 되려 어떤 정치적 폭압 속에서도 자신과 예술을 지키려는 노력을 거부하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꽃은 핀다. 그는 척박한 땅에서 꽃나무를 가꾼 만신창이의 정원사였다.
혁명은 낭만적이지 않다. 그가 평생을 고통받으면서 글을 써 내려갔던 것을 보면. 개인으로는 정신분열적 상황, 집단으로는 폭력과 폭압의 상황, 그 이상 그 이하의 모습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시간을 보낸 후에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 힘에 몸을 맡겨 다음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는 그래서 그다음 단계, 즉 '넥스트 레벨'일 것이다.
성취된 승리의
유희와 고통은
팽팽한 활의
단단한 시위. (책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