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이유
오늘은 "읽고 쓰는" 글은 아닙니다. 실은 목표했던 것을 다 읽지도, 그러니 쓰지도 못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한 주에 여러 편의 글을 쑥쑥 뽑아내는데 어려움이 없어 보이던데 저는 그렇지가 못하더군요. 한 주에 한 꼭지 겨우 써내면서 그 조차도 이번 주는 이런저런 핑계로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맙니다. 아니, 이건 놓치는 게 맞습니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독서와 문장 앞뒤를 대충 추려 맞추는 글은, 아무래도 안 되겠지요. 약속한 시간 안에 글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변명도 어렵습니다. 신뢰를 한번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읽었던 책을, 혹은 읽었어도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책을, 읽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 고민부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활자를 눈으로 훑거나 옮겨 쓰거나 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지요. 써보는 것, 그리고 같은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것. 단, 쓰고 이야기할 때는 결국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하는 것. 그래서 책은 깊이 들어가야, 오래 남는 것. 열아홉 권의 책을 고르고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지난 열아홉 권에 대한 글을 다시 돌아봅니다. 비틀거리며 쓴 글, 우쭐대며 쓴 글, 가볍게 타자만 날아다닌 글, 대체로 부끄러운 마음이 큽니다. 쓴 후에 여러 번 본다고 봤는데도 여전히 주어-술어도 안 맞는 어떤 문장은 지금이라도 고쳐야 하는데도, 또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으름까지. 글을 내려야 하나 고민도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조언처럼, 부끄러움이 들었다면 그때의 글보다는 앞으로가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가파른 한 걸음을 또 옮겨야지 마음을 다잡습니다.
소설은 최근 몇 년의 저에게는 도피처였습니다.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발을 옮길 수 있는 여행지였습니다. 누군가의 삶으로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생활 안에서 크고 작은 결정과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많아질수록(어른이 될수록) 저에게 어떤 감정과 판단이 나에게 적절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소설은 그 어떤 실용서보다도 더 매끈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감정을 배울 수 있었고, 배워진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법도 소설로 배운 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다소 투박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깨닫고 극복하고 때로는 파멸하는, 소설 속 수많은 인간군상의 모습은 부족한 제 모습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할까요. 또 소설 속 인물을 본받고 싶다거나, 반면교사로 삼는 일도 있다 보니 소설을 읽으며 한 뼘은 키가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근육만큼이나 굳어져가는 생각의 경직도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제는 어디선가 본 것 같아도, 이야기의 주인공만 다른 것 같아도, 우리는 소설을 읽습니다. 본질이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너무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인간성을 지키는 일 중에 소설 읽기가 저는 무조건 포함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해 본다는 것, 그래서 그 이해의 길이 결국 나에게로 이어진다는 것. 결국 소설은 인간을 통찰로 이끕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 모든 변주의 원형은 한 가지라 하더라도, 신작 소설을 읽는 이유는 거기에 있겠지요. 지나간 오래된 소설을 다시 읽는 이유도요. 그래서 본질에 닿아보려는 연습을, 소설을 읽으며 하게 됩니다.
얼렁뚱땅 스무 편의 글을 마무리하여 "읽은 후에 만날까요" 연재를 종료할까 합니다. 책은 읽겠지만 일주일 안에 생각의 타래를 잘 풀어내기가 어렵네요. 생각이 두툼해지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실은 연재의 마지막 책으로, 얼마 전 녹색광선에서 출간한 빨간색 표지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쉐리>를 읽고 쓰려했었는데요. 콜레트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했던 버지니아 울프 이후 시몬 드 보부아르, 한나 아렌트, 시몬 베유와 함께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 작가입니다.
다음의 글들은 다른 형태의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만,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쉐리>와 연결될 무언가를 우물쭈물 꺼내보겠습니다.
새해에는 더 좋은 책들과 키도 근육도 마음도 쑥쑥 자라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멀리서, 서 계신 자리에서, 스무 번의 목요일에,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