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공룡능선,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향하는 길은, 되돌아갈 수 없는 ‘공룡능선’이었다. “되돌아갈 길이 없다. 건강상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돌아가라.”의 느낌으로 붉은 고딕체로 쓰인 경고문이 공룡능선의 입구에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의 4.5km가 현실이 되자 겁이 났다. 배낭끈 아래로 고인 땀이 식을 틈이 없었다. 심장박동이 더 크게 솟구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한번 더 묻는다. “괜찮아? 갈 수 있겠어? 컨디션은 어때?” 이 말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다. 산에서는 이때가 가장 솔직해야 할 순간이다. 글자 그대로, 정말 갈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 한번 더 물어야 한다. 내 몸을 다시 한번 더 점검하고 또 돌아보는 시간이다. 갈 수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산행을 지속하다가는 함께 걷는 반려와 함께 조난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못 갈 것 같으면, 못 간다고 말하는 게 함께 걷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이를 통해 산행의 속도를 조절하고 거리를 가늠하고 산행의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해야 한다. 여러 번 서로에게 묻는다. “갈 수 있겠어? 컨디션 다시 한번 점검해 봐. 다리, 무릎, 괜찮겠어?”
대한민국 제1경 답게, 공룡능선은 등산 난도도 최고를 자랑한다. 먼저 가본 사람들에게 여러 번 물었다. 우리의 산행 경력(?)을 이야기하며. “제가 공룡능선을 다녀올 수 있을까요?” 여러 명에게 물어도 또 확신할 수 없어 등산인들만 모여있는 카페에도 가입해서 물었다. 그리고 몇 번의 돌다리를 두들겨 우리는 등산을 시작했고, 마등령을 넘었으며 드디어 공룡능선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마등령 삼거리에서는 아침식사를 하고, 신고 있던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발을 식혔다.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마음의 준비였다. 삼거리에서는 공룡능선이 힘들 경우 다른 곳으로 길을 잡아 하산할 수도 있었다.
“공룡능선이 힘든 건, 공룡능선 때문만이 아니지. 비선대까지만 3km 미터야. 평탄하긴 해도 그 길을 다 걷고, 가파른 오르막인 마등령을 3.5km를 걸어야 공룡능선이 나타난다는 점이지. 그렇게 힘이 한참 빠진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점. 그래서 공룡만 타라면 못할 사람은 많이 없어. 그리고 공룡이 끝난 후의 길도, 하산인지 등산인지 모를 정도로 긴 하산길이 기다리고 있지. 공룡능선은 공룡능선만이 아니야.”
마등령 삼거리, 아늑한 숲에 모인 각자의 사람들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다시 준비 운동을 했다. 초콜릿과 사탕을 작은 주머니에 따로 챙겨 넣고, 모자를 고쳐 썼다. 누군가는 장갑을 끼며 등산 스틱을 접어 넣었고, 누군가는 그대로 손에 쥐었다. 등산 스틱을 집어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네 발로 기어가듯 가파른 바위를 오를 일이 많다는 뜻이겠다. 우리는 갸우뚱하다 일단 등산스틱을 손에 쥐고 걷기로 했다. 긴장감이 도는 어느 시점에 공룡능선으로 진입하는 길에 아침 햇살이 강하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풍광에 탄성을 쏟아내며 하나둘 출발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는 사람들이지만, 앞으로의 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공룡을 넘을 소중한 인연이었다. 공룡능선은 대체로 오르막과 내리막의 끊임없는 연속이었다. 멀리서 보면 뾰족한 능선이지만, 직접 걷는 눈앞엔 자갈과 모래, 그리고 거대한 바위뿐이었다. 그 바위 사이사이에 꽂히듯 자라고 있는 나무들.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의 길이 보였다. 그 자연의 매서움이 나무의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계산된 듯 조화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두뇌라면, 우리도 결국 이 자연의 일부일까 싶어 새삼스럽다.(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산에 오르면 비로소 극명해진다.)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가는 곳곳마다 발길을 붙잡는 풍경이 우리 곁을 따라 걸어주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곳곳에서 함성과 환호를 지겨울 정도로 내질렀다. 본능처럼 터져 나오는 함성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어서 아무나 붙잡고도 풍경을 말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나도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대단한 풍광을 본 적이 세상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긴 했다.
가는 곳곳마다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보려 노력하고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모두 꽝이었다. 사진은 이 풍경의 십 분의 일도 담지 못한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유튜브에서, 혹은 블로그에서 미리 공룡능선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사진과 영상을 업로드하면서도 이 사진과 영상은 실제를 담아내지 못한다며 한탄했다. 실제를 담아내지 못하는 영상과 사진에도 나는 감탄했고, 그래서 더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마어마한 기대를 안고 공룡에 올랐고, 그 기대를 뛰어넘는 장관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때의 풍경은 화면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산은 매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매일 다른 방향에서 바람이 불고, 햇빛이 비추며, 매일의 온도가 달랐다. 나는 딱 한번 순간에 지나는 자연의 거대한 공연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그리하여 다리가 힘든 줄도 어깨가 아픈 줄도 모르고 걷고 또 걸었다. 마등령의 무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공룡능선에 내 체력을 고스란히 바치는 줄 모르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체력이 탈탈 털려나갔다는 건 공룡능선을 빠져나오고서야 알았을까 싶다. 자연에 마음을 몽땅 빼앗기고, 몸까지 새로 갈아 끼운 듯했다. 나를 나로서 느끼게 하는 이 자연이, 딱 한 번의 공연 같은 이 순간의 느낌이, 연습 없는 삶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했다.
1275봉을 오르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공룡능선을 5시간 안에는 주파하여 신선대까지 닿아야 하는 목표를 정해두었는데, 등산을 시작한 지 3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1275봉은 2시간 반 만에 지나야 했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생각보다 만만한 산행이 아니었음을 체감했다. 좋은 풍광 다음엔 힘든 산행길이 남았다. 묵묵히 한 걸음씩 오르는 그 발에 언젠가는 끝나는 길이라는 확신 아래, 말없이 한 걸음씩 디뎠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서 봉우리들을 오르다 내리 다를 반복하는 시간 속에서 가장 재밌었던 바위는 단연 킹콩바위였다. 납작한 뒤통수를 쓰담쓰담해주고 싶은 누가 봐도 킹콩.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카메라 안에 다 담기가 쉽지 않았다. 킹콩바위 이외에도 이런저런 형태로 내게 상상력을 자극하던 기암괴석들의 웅장함에 정신을 놓으며 걸었다.
그렇게 한계에 다다를 때 즈음, 나에게 가장 공룡능선은 가장 큰 보상을 해주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마등령 삼거리에서부터 지나온 공룡능선의 모든 길을 내게 병풍처럼 펼쳐 보여주는 풍광이었다. 신선대에 서니, 마등령에서부터 이어진 공룡의 등뼈가 내가 걸어온 길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필름처럼 펼쳐 보여 성취감과 동시에 감격스러운 감상을 이 산이 내게 선물했다. 어떻게 저 긴 길을 걸어갈까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황홀경의 순간이었다.
실은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했던 나는 각자의 짐을 지고 등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매 순간 마주했다. 등산을 싫어하는 이가 내 주위 가까운 모든 사람들인데, 가만 보니 정작 프로 산꾼들이었다. 그렇게 다들 등산을 잘했다. 산엔 안 간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매일같이 자기 삶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때로 조난일 때도 있고, 때로 그 자리에서 웃을 때도 있지만 전부 다 등산인이다. 많은 풍경들 사이에서 힘을 내며 스스로를 소진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삶의 목적이 풍경은 아니어도 각자의 풍경에 감탄하며 걸어간다.
그렇게 등산은 모두가 함께 걷는 아름다움 뒤에 거짓 없는 나 자신의 한걸음을 잊지 않게 한다. 이제야 생각하면 그래서 나는 산에 오르게 되었을까. 노력으로 모든 것들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고 나서,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 가장 어릴 때 배운 진실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등산 이어서일까.
언젠가부터 삶은 생활에 잡아먹혀서, 무언가를 "계획"하는 것도 때로 귀찮아졌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 "실행"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실패는 생활이고 친구였다. 그래서 낯선 성공보다, 익숙한 실패가 내 이름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삶의 모양이 조금 달랐다. 계획, 실행, 그리고 상상 이상의 성공. 내 인생의 첫 공룡 능선은 그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다. 해뜨기 전 시작한 등산이, 해가 저물 무렵에야 끝났다. 15시간의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