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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만 잘 넘기면 된다, 그 마음으로 마등령까지.

설악산 공룡능선, 첫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by 경계선

산행을 시작하기 전, 이렇게 긴장되는 순간이 있었을까!

약간의 걱정, 조금 더 많은 설렘, 그리고 제일 큰 기대!

짐을 챙기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산의 날씨는 무쌍하니 비바람을 막는 재킷이 필요할 것 같다. 손수건과 모자는 두 개씩. 여분의 등산양말도 한 켤레 더. 손가락이 뚫려 있는 장갑이 바위를 잡기에 더욱 편하니 얇고 튼튼한 등산 장갑으로. 스틱도 한번 더 점검하고. 물과 음식은 더욱 넉넉하게. 무릎보호대를 하기 전에 무릎테이핑도 동영상으로 배워서 감아본다. 티셔츠는 최대한 땀을 빨리 날릴 수 있는 합성섬유이거나 울(Wool) 소재의 티셔츠라야 할 것 같다. 제일 중요한 등산화는 이미 예전에 구비한 발목을 지탱해 주고 접지력 좋은 중등산화로.


설악산에 가려거든 그래도 정상인 대청봉을 먼저 가는 게 수순이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산이든, 정상을 가보는 일이 의례 첫 번째 순서가 아니냐고. 그리고 살아가는 일에는 순서가 있듯, 그래도 쉬운 것 다음에 어려운 것을 해보는 게 어떤가 하는.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쉬운 것부터 할 수 있는 시간이 항상 오진 않았다. 해야 할 일과 닥치는 일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간을 보낸 일을 '살아간다'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설악산에 가는 일도 그랬다. 대청봉은 공룡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공룡능선은 아니었다. 나의 체력이 허락하고, 내 시간이 허락하고, 그날의 날씨가 허락하고, 무엇보다 설악산이 허락해야(강풍, 폭설, 폭우가 아닌 날) 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만족할 수 있는 날은 그리 흔치 않았다. 공룡능선처럼 최고 난도의 산에는 너무 더운 여름엔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을 것 같았고, 겨울은 아마 눈이 내리고 얼어붙어 대체로 위험하거나 등산로가 통제될 것이 분명했다. 내 실력과 체력으로 갈 수 있는 계절은 그나마 봄과 가을이었고, 나는 연휴가 긴 어느 해 봄, 연둣빛이 피어나는 공룡을 보기로 했다. 나의 의지와 발걸음으로 하루 열 시간 이상 진지하게 설악산에 몸을 기울이는 첫 산행으로, 공룡능선을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봄에 공룡능선 가게 되면. 혹시, 산솜다리 있는지 잘 찾아봐! 누구에게나 보이는 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산솜다리 볼 수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단다. 예전엔 설악산 도처에서 볼 수 있었는데 산꾼들이 다 꺾어가고 훼손되어서 이젠 공룡능선에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만 좀 남았다고 하는데. 나는 봄에 공룡에 간 적이 없어서 본 적이 없거든. 꼭 보고 와." 외삼촌으로부터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산솜다리라는 야생화 찾는 미션까지 받은 나는 무언가 부푼 꿈에 공룡에 오르기 전날 밤, 잠을 설쳤다. 에델바이스로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검색해 보니 정말 귀한 야생화였다. 그러나 난 그런 야생화를 볼 만큼 여유 있는 산행을 하진 못했다.


강원도 속초에 점심 무렵 도착한 뒤 백담사 쪽으로 가 수렴동 계곡을 네 시간 정도 트레킹하며 몸을 좀 풀고 작은 숙소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3시 50분에 산행을 시작, 헤드 랜턴을 쓰고 내설악 탐방의 출발점인 소공원에서 비선대 방향으로 걸었다. 오늘의 총코스는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거리, 19.7km. 해지기 전에만 잘 도착하면 그걸로 다행이라 생각했던 거리였다. 그것도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공룡능선 산행까지 포함한 거리로서는 말이다.


깜깜한 소공원에 누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그 시간에 등산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모두 반짝이는 불빛을 매달고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새벽 3시에 등산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공룡능선으로 갈 사람들 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소공원에서 대청봉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기 때문에 보통은 대청봉을 소공원에서 시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묵묵히 돌바닥을 밀어내는 발걸음은 서서히 정면으로 추진했다. 모두가 자신의 몸을 엔진으로 삼아 에너지를 태우며 걷는다. 왜 걷냐고 묻는 일을 그만둔 지는 오래되었다. 대체로는 풍경을 보고 싶어 걷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걷다 보니 생각이 사라져서 걷는다고 했다. 그런데 말들이 다 필요 없는 구간이 비선대에서 마등령으로 가는 3.5km 구간이었다. 중등산화의 둔탁한 소리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와 거칠어지는 숨소리만 남는다. 마등령으로 오르는 무자비한 경사각 앞에서는. 이 구간에서는 그저 무념무상이 최고의 등산방법이다. 너무 힘들 때는 땅만 보고 걷는 거다. 너무 힘들 때는 내 발밑만 보면 된다. 그 발을 멈추지 않겠다는 마음도 필요 없다. 이 비탈에 서 있을 수 없으니 가야만 하는 동물적 감각으로만 간다. 너무 힘들 때는 오늘 하루만 잘살면 된다 생각했다. 1km를 걷는데 1시간이 걸리는, 다섯 걸음 오르고 1-2분 쉬고. 다섯 걸음 오르고 다시 쉬는. 그 길 위에서 오늘 하루만 잘 살면 된다던 그 마음이 왜 떠올랐을까. 그런데, 그게 마등령을 오르는 방법이라 했다. 힘들다는 생각 자체, 왜 오를까에 대한 물음 자체, 언제 끝날까 짐작하는 그 자체, 그 자체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변해서 이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 그냥, 내 발 하나만 보고 걷는 거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마등령을 오르는 방법이, 어렵고 힘든 시간을 통과하는 삶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의 태도가 삶에 대한 은유였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누구나 각자의 짐을 지고 산에 오른다. 같이 오르긴 하지만 이 역시도 혼자 하는 일이다. 좁은 바윗길을 오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반려가 있지만 그는 그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나의 길을 대신 밟아 줄 수가 없다. 오히려 반려가 못 걷게 되면 나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함께 걷거나 함께 조난당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든 이상적으로든 업고 걷는 건 어렵다. 이 길은 평지가 아니다. 삶의 난이도처럼 말이다. 각자가 맨 배낭만 못되어도 4kg이다. 그러니 그와 나 둥 중 한 사람만 넘어져도 우리는 조난일 것이다. 조난당할 확률을 줄이려면 혼자 걸어야 하지만, 그러나 나는 반려와 함께 걷는다. 멀리 가기 위함도 아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만 자신을 돌보는 존재이더라. 나는 나를 돌보기 위해, 당신은 당신을 돌보기 위해. 그래서 그 자체가 우리이기를 위해. 이 길을 왜 함께 가는지에 대한 삶의 은유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마등령을 오르기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나 이미 일출이 오고야 말았다. 3km 정도밖에 오르지 못한 그 시점에 나는 경사각이 조금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돌계단이 아닌 나무 데크의 순탄한 계단이 이어지고 눈앞에 공룡능선의 웅장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등령삼거리까지 우리가 계획했던 시간은 정확하게 3시간 30분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길 위에서 공룡능선의 시작점에 설 수 있었다. 긴장과 기대는 더욱 커졌다.

저 뾰족한 봉우리를 모두 넘어야 한다니....

저 뾰족한 봉우리에 설 수 있다니!

긴장감과 기대감은 서로 이기지 못하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IMG_0520.jpg 마등령을 채 오르기 전, 해가 어렴풋 바위와 바위 사이, 골짜기와 골짜기마다 조금씩 들어찹니다.
IMG_0531.jpg 아직 마등령 삼거리에 닿기 전. 뾰족한 봉우리들을 모두 넘어가야 합니다. 네. 공룡능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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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598.jpg 이름만 봐도, 마음이 콩닥콩닥합니다. 공룡능선. 한번 진입하면 퇴로는 없거든요.


덧) 이 코스는 소공원 - 비선대 - 마등령 - 공룡능선 - 무너미고개 - 천불동계곡 - 비선대 - 소공원으로 돌아오는 총 19.5km의 거리입니다. 저희 부부는 당일산행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소공원에서 비선대까지의 거리는 액 3km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트레킹 수준의 길입니다. 산을 정말 빨리 오르는 분들은 30-40분 만에도 주파하시죠. 저희는 5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비선대에서 마등령(마등령 삼거리)까지 오르는 거리가 3.5km밖에 되지 않지만, 저희는 3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비선대의 해발이 약 300미터이고, 마등령은 1220미터이다. 3.5km 안에 고도를 900미터 가까이 올리는 극강의 경사도이기 때문이지요. 등산을 잘하시는 분들은 더 빨리도 가시지만, 대체로 3시간 내외는 걸리는 거리입니다.


덧) 공룡능선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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