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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 깊이 오른다는 것.

이제야 오릅니다.

by 경계선

한 권의 책으로도 삶이 바뀐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장소' 하나가 삶을 바꿀 수도 있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일이 익숙해지고, 익숙함 속에서 '새로울 것 없음'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새로움이 사라지면, 생활은 쳇바퀴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겪어본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쉽게 말한다. "이젠 새로울 게 없다"라고. 그렇게 '익숙함'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권태를 먹고 자란다. 다 해본 것 같고, 다 가본 것 같고, 다 읽은 것 같은. 아는 게 적고 산 날이 적을수록 이 권태와 자만에 쉽게 빠진 것만 같다. 게다가 어른이 되고서는 나의 삶에 대해 말을 얹는 사람이 희귀하다 보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알기란 또한 어렵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다녀온 뒤, 내 삶의 모양이 약간 달라졌음을 인정했다. 당장의 급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입는 옷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먹는 음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표면의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조금은 바뀌었달까. 아무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진 못하겠지만, 나만은 안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오르막 내리막을 오르내리며 구름처럼 이동하는 무거운 다리 덕분에 나는 나의 몸이 귀함을 이제야 알았다. 단 한번 보여주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눈, 굉음으로 달리는 바람의 소리를 듣는 귀,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며 알려준, 나와 세상의 경계. 나는 내 몸을, 내 몸으로서 얼마나 인식해 왔을까. 인식하지 못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수정할 수 있게 된 것도 공룡능선을 다녀와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그 풍경을 언제까지라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제법 생활을 달뜨게 했다. 늦은 나이라도 어떤 경험은 한 생을 이끌고 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 이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몸에 새겨지는 것과도 같은데. 강렬한 글에서 만난 어떤 통찰, 연주회에서 들려오는 명징한 피아노 소리, 그런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온몸에 새겨진 감동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나라는 생명체로써의 자신감. 그 자체였다. 그리고, 산은 나에게 나로서의 모습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위로였다.


나는 산에서 내 몸으로 충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등산의 고통과 힘듦, 왜 걷는지에 대한 물음 자체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했다. 대답은 의문을 품은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나는 의문 대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확신을 누리는 것. 확신은 설악산의 다른 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아직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대청봉. 설악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정상'을 목표로 삼는 것이 등산이라면, 나는 처음부터 대청봉을 올랐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 봉우리가 진짜로 궁금해졌다.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곳이어서라기보다, 높은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 감당해야 할 많은 시간들과 그 후에 오는 어떤 감상과 확신이 궁금했다. 설악산 대청봉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먼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청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중에서도 오색약수터에서 시작하는 길은 짧지만, 가장 가파르다. 짧은 속에 숨은 인내의 길이었다. 시야에는 앞사람의 발뒤꿈치와 하늘을 가린 나뭇잎 밖에 없다. 풍경이 달라지지 않아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어렵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가파른 고도. 이 길은 그 자체로 '땅을 바라보는 수행'이었다. 빠른 사람은 3시간 정도에도 올라가지만 대체로 이 길을 오르는 시간이 4시간 이상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무릎과 허벅지, 종아리의 과부하 끝에 만나는 정상. 나는 차라리 마등령이 낫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등산로를 수정했다. 해발고도 800미터 정도에서부터 시작하는 한계령휴게소에서 시작하기로 말이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한계령 삼거리까지의 가파름을 버티면, 그 뒤엔 대승령이라는 먼 줄기에서부터 이어져오던 능선이 이어진다. 공룡능선처럼 뾰족하지는 않지만 설악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서북능선을 통해 대청봉까지 오르는 길이다. 총 13.3km의 거리를 예상하며 한계령삼거리로 발걸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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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높은 해발에서 시작하지만 시작시점부터 2.3km 정도를 걸어 한계령삼거리에 들어설 때까지는 쉽지 않은 구간이었다. 그러나 서북능선을 거쳐 큰 봉우리들을 하나씩 만날 때마다, 해발고도 1400m 이상에서 느낄 수 있는 청량함이 머릿속을 비워냈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에 펼쳐지는 먼데 보이는 기암괴석의 봉우리들에 감탄하며 홀린 듯 발길을 이었다. 대체로 완만한 경사이지만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사고로 이어질 것 같은 바윗길을 건너는 구간도 더러 있었다. 서로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며 한 걸음씩 봉우리들로 향했다. 제일 먼저 등장할 끝청봉에서부터, 소청봉과 중청봉을 찬찬히 만나고, 마지막 순간 오르는 대청봉까지. 나는 산을 높이 오르는 느낌보다는 깊이 오른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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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에서의 우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큰 감동과 누르지 못할 감정을 예상했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가장 높은 봉우리. 해발 1708m.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작은 표지석. 막상 끝나고 나면 후련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길이 끝나기만을 바랐던 그 숱한 시간들의 끝에 다다라, 나는 정작 이 길이 끝나길 바랐던 것이 맞았던가 자문하게 된다. 끝까지 가보면, 의외로 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삶이 끝날 때에는 의외로 시시할지도 모른다. 끝내고 싶은, 벗어나고 싶었던 그 굴레 속에, 사실은 삶의 정수가 녹아 있었던 건 아닐까. 진짜로 끝나면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 정상에서의 만족감은 길어야 3분. 물론 그 3분이 나머지 생을 지탱할 만큼 긴 시간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하산 후에 깨달았다.

IMG_0733.jpg 중청에서 대청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천불동계곡의 모습. 멀리 보이는 속초 앞바다.
IMG_2836.jpg 중청에서 바라보는 대청봉. 마지막의 봉우리를 올려다보며.


*시인 나희덕의 시 <속리산에서>의 시구를 모방하여 변형하였습니다. 20년도 넘은 어느 시절에 읽은 그 시 한 편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목이 산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언젠가 가 본 속리산은 시인의 말처럼 순했습니다. :) 시의 전문을 첨부합니다.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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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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