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도 일상에 포함된다면 너무 포악하지만.

그냥 대충 살 거야.

by 경계선

위수정의 소설 <눈과 돌멩이>와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의 영화 <슈퍼 해피 포에버>


무기력의 끝을 잡고 거실 바닥에 배를 뒤집고 누워 있기를 지속했다. B형 독감의 후유증이라고 하기에는 예민한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눕는 장소만 달리했던 약 2주간의 생활은 그 자체로 피폐와 자기 파괴적인 순간으로까지 이어지는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또 나를 쉼 없이 자책한다. 남현정의 ⟪아다지오 아사이⟫ 같은 소설은 이 시기에 읽지 않았어야 하나 생각했다. 성동혁의 ⟪아네모네⟫ 같은 시집도. (좋은 작품들을 강박적으로만 대했던 것 같다.) 무기력의 끝에 겨우 속초에 있는 비싼 리조트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예약했다. 비수기 평일의 혜택. 리조트를 예약했기 때문에 목적도 없이 간헐적인 기침을 달고서 속초와 강릉 여행을 다녀왔다. 강릉의 작은 동네 책방에서 예니 에르펜베크의 ⟪카이로스⟫라는 두꺼운 소설을 몇 번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기침을 몇 번 삼키며 단편집을 골랐다.(인터넷 장바구니에 모셔두고.) 작품이 간단하진 않다. 위수정이 대상을 받은 2026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말이다.

비싼 리조트에 앉아 이 책을 읽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같은 책방에서 남편이 고른 최승자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들추다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듯해서 다 읽을 수도 없었다. 같은 단어라도 작가에 따라 활자의 무게가 모두 다르다. 어떤 활자들은 공기만큼이나 가볍고 날렵해 중력을 거스르는 가벼움도 있지만, 같은 단어라도 어떤 작가들의 활자들은 땅 위에 존재하지도 못할 만큼 심연으로 깊이 가라앉는 무거운 활자들도 있다. 최승자의 시에는 가벼운 글자가 하나도 없어서 비싼 침대에 물먹은 스펀지처럼 누워 나는 이 리조트의 귀신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잠시 그 시집을 미뤘다.


내 취향에 맞는 카페를 몇 군데 돌아다니고, 뜨끈한 대구탕이나 해산물을 조금 먹다 삼일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테이블 스탠드를 켜고 위수정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뒤 스탠드의 불빛을 끄는 딸깍 소리가 허공에 길게 울렸다. 상실이 일상이지 않은가. 일상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 아닌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 인생 아닌가. 뭐 새로울 것 있는 이야기라고 소설을 썼나. 별별 생각을 하다 보니 이불을 끌어당기고도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것은 일상인가. 친구의 뼛가루를 들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일상적인가. 다시 소설 속의 그런 내용들을 반문해 본다. 일상의 범위는 포악하구나.


지난 12월 말, 히터를 아무리 틀어도 발가락이 따뜻해지지 않던 어느 날 반가운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함께 보았던 영화 <슈퍼 해피 포에버>가 생각났다. 가을부터 보겠다고 메모를 해두었음에도 짧은 한 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빼낼 수가 없던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겨울이 되어서야 그 포악한 일상을 지나 조금의 여유가 허락되었다. 한 시간 반의 러닝타임의 시간, 그리고 심리적 러닝 타임의 몇 시간을 덧붙인. 잔잔한 바닷가, 더운 여름의 날씨, 자잘한 순간을 함께 포착한 어느 시점에 마주친 서로의 눈빛. 주인공 남자가 찾고 싶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가졌던 것을 잃었던 것이 상실, 그 상실을 일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포악하지 않은가.


다른 이유와 장소에서 보게 된 두 작품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일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일본’이라는 공통적인 배경 때문일까.

영화에서는 너무도 사소한 데서 불현듯 시작되었던 사랑이 결국 바다 너머에 있을 것 같은 어떤 곳으로 떠나버렸다. 주인공은 그 상실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몸부림치는 장면을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빛바랜 한 장면씩 탁탁 다가왔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흐르는 음악 ‘Beyond the Sea'(Robbie Williams,2001)는 자연스러웠다. 그가 찾아 헤맨 빨간색 모자는 그 자체의 일상으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제법 평온했다. 이 모든 상실이 포악하지 않게 느껴진 건,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이었다. 인생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도 생각났달까.


일상 속의 상실을 포악하지 않게 받아들여야지 생각하게 된 건, 위수정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날이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소감을 썼다. 나도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대상 작품이라기보다는.... 말 꼬리를 길게 잡았다. 대상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뒤의 말을 뭐라 했어야 옳았을까. 딱히 어울리는 뒤의 말이 없었다. 이 소설이 대상다웠다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서야 감각으로 다가왔다. 일상의 범위가 상실까지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 포악할까. 우리는 어디까지 상실할까. 내가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버리고 버림받고 떠나고.


나는 일상을 너무 나이브하게 본건 아닐까. 생은 실전이라고 하면서, 일상은 왜 실전으로 살지 않았을까.


상실하는 것들 사이에서, 주인공이 주머니에 숨긴 돌멩이 하나. 그 작은 무생물 하나가 결국 내가 돌아갈 곳, 내가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일상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바라 이 시간까지 분투했을까. 그래서 이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뫼비우스 띠 같은 생각에 갇혔다. 결론은 나지 않고, 그저 걷는다. 방향을 잃었다. 아니, 누가 알려준 방향이 있었나? 누가 옳은 방향이라고 말해 준 것이 있었나? 나는 무슨 방향을 잃었나?


다가오는 새로운 시작이 며칠 남지 않았다. 나는 대충 살 거야. 내 생각의 결론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진하고 기진하고 오버부킹된 삶 말고. 상실하고도 상실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상 말고. 포악한 일상이어도 담담하게. 나는 대충 살아야지. 나도 나의 돌멩이를 몰래 숨기고,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 외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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