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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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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Sep 14. 2015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죽음에 대한 짧은 생각.

거창하게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죽음을 느끼지 못할 뿐.


작년 가을에 우리 집에 뱅갈 고무나무를 한그루 들였다. 녀석의 잎은 날이 갈수록 반짝했으며, 손바닥만 한 초록색 잎은 손을 잡아달라는 듯 언제나 말을 걸어왔다. 초록도 그냥 초록이 아니고 연둣빛과 초록이 여러 색으로 나누어져 빛을 더 받은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색이 선명하게 나누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색감이 예쁜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고무나무를 쳐다보았고 물주는 일도 햇빛을 보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애지중지했다. 때로 고무나무 때문에 일부러 음악을 틀어놓기도 했다. (식물이 음악을 들으면 더 잘 자란다는 얘길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기까지 겉흙이 마르지 않는 것 같아  물 주기를 좀 뜸하게 하였는데, 잎이 하나 둘 떨어졌다. 꽃보다 곱고 예쁜 고무나무 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심히 괴로웠다. 왜일까, 왜일까, 혼자 고민도 해보고 인터넷도 찾아봤고, 잘 아는 분께도 여쭤봤는데, 답은 없었다. 사실 전문가에게 식물을 보여야 하는 부분이었다. 직장에 동료 중 텃밭을 가꾸시는 분이 있어 최대한 설명하고 나뭇잎의 상태로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며 여쭤봤다.  그분은 대답 대신 유홍준의 시를 한편 들려주시며 껄껄 웃으셨다.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 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느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처음엔 이 시를 받아 들고 웃음이 났다. 제목도 무려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그리고 알았다. '우리는 제법 많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고  있구나'라는 것을. '인간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겠구나.' 싶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닌 고무나무의 죽음이 내 주위의 의미 없는 타자의 죽음보다 더 소중하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적 의미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슬픔은 그러므로 위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 본연의 슬픔을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그러고보니 슬퍼 슬픈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쁨은 때로 이유 없이 기쁜 적도 있었으나, 슬픔은 언제나 이유를 동반했다. (아, 이것이 슬픈일이구나.)

우리 집에 와서 죽은 것은 많다. 능청스럽게 죽인 것도 많다.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실로 알 길이 없다. 많은 죽음을 먹고 우리는 살고 있으며 많은 죽음이 잉태한 또 다른 삶의 생존을 보게 된다. 우리 집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 그리 많을까. 죽어 나가는 것이 더 많겠지. 그러므로 아름답게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아름답게 죽는 일도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막연하게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태어나 누구나 밥 먹고 잠자고 사랑하듯이 누구나, 죽으므로.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실 확실히 알았다.
우리에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며,
'지금' 말고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매일 죽음을 잉태하며 우리는 생활하고 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말을 '허무'나 '비관'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허무나 비관이 아니라 '소중함'의 다른 말이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모든 것들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겠다. 한정된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간 사람만이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죽음은 육체적 고통이 없는 죽음도, 문상객이 많은 죽음도, 재산이나 업적을 많이 남긴 죽음도, 누군가가 많이 슬퍼하는 죽음도 아닐 것이다.


제법 오래 곱씹었던 책이 있다, 어쩌면 아직도.

봄에 읽었던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대목(p.219)이 생각난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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