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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Oct 15. 2015

시(詩)를 베껴 쓰는 일.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중 일부를 딥펜으로 베껴쓰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다. 교과서에 있는 시와 모의고사 시험지 혹은 문제집에 등장하는 새로 보는 시, 그리고 나중에는 신문에  한 번씩 등장하는 시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신문에 있던 시는 가위로 오려서 수첩에 붙여두었고 시험지도 오렸으며, 오릴 수 없는 시는 직접 쓰기 시작했다. 노트에 한 글자 한 글자 베껴 쓰다 보면 의미에 대해 한번 더 곱씹게 된다. 좋은 글은 글씨로 옮겨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치 시를 쓴 시인의 마음과 그 시마저 내가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듯.


실은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의 모든 시를 모조리 외우게 하셨다. 진도 나가기도 바쁜 시간에 시를 외울 시간을 따로 주고 매 시간 무작위로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시를 외우게 하셨다. 어떠한 연관관계도 없고, 논리적 이해도 되지 않는 것들을 외우는 일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고등학생에게 시를 외운다는 것은 '활자'를 외우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외우면서 나는 아마도 조금은 더 시와 같은 삶을, 혹은 시의 언저리에서 살게 된 건 아닐까 감사할 때가 많다. 이해되지 않는 그 학습법이 나는 지금까지 초중등교육을 받은 많은 순간 중에 가장 값진 시간으로 뒤돌아보게 된다.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험에 나오는 부분으로만 시를 '공부'했던 시간들을 지나 때로 제대로 외우지 못해 혼났던 시간들을 지나 시는 머릿속에서 가슴속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나의 아이디인 "나빌레라(navillera)"도 그때 외웠던 조지훈의 "승무(僧舞)"라는 시에 등장하는 시어(詩語)이다. 이 시어를 처음 보고 그 어감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모든 시인을 존경하기로 한 것이.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마술사 같은 사람들이 시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부터 나는 나의 이름 대신에 이 시어를 즐겨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오래 이 시어를 쓰고 있구나 싶다.


시를 베껴 쓴다는 일은 삶을 향기롭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시를 직접 짓지 못한다면 시를 베껴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썼던 수첩에는 시를 제법 많이 써놓았다. 그 시들을 다시 곱씹어 읽다 보면 나의 눈과 입도 향기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향기가 나의 공간을 메우면 더 없이 행복해진다. 시는 그리하여 공간을 차지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다. 발간되는 단행본 책 중에 거의 가장 얇고 값도 싼 책이 시집이지만, 우리 집 서재에는 시집이 차지하는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지만 시집의 향기는 대단하다. 그리하여 시집은 가장 높은 곳에 꽂아둔다.


언젠가에는 잉크와 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쓰는 일을 좋아하니 잉크와 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만년필보다 딥펜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도 딥펜이 시와 비슷한 성격이어서이겠다. 잉크에 콕콕 찍어 쓰다 보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시의 운율처럼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또한 잉크의 흐름과 번짐에 더 없이 여유를 가지게 된다. 딥펜이 잉크를 많이 머금고 있지 못하므로 쓰다 보면 글씨가 끊어지는 일도 다반사, 농도의 엇갈림이 사람의 호흡처럼 자연스러워 이 역시도 사랑스럽다.


가을이다,

헛헛해하지 말고 세상만큼 시끄러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시를 베껴 쓰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좋겠다. 그러면 뉘엇 넘어가는 해도 덜 외롭겠다.



+ 언젠가의 시간에는 이성복 시인보다 더 오래 백석에게 탄복했던 때가 있었다. 당연히 그의 시를 이해하기란 역부족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간직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갈매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도 찾아봤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알았다,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등장하는 시어를 안도현 시인이 시집 제목으로 썼다는 것을.(안도현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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