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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모아

육박해 가는 과정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

by 서용훈

먼 옛날 지금의 중국 땅 위에 있던 진나라이야기다.


왕이 주변 나라를 모두 정리하여 통일하고서는 스스로를 황제라 이름 붙이며, 세상 모든 것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고는 전례 없는 법통의 체제를 정비하고서는 세상 모든 '잘못'에 대한 단죄를 엄히 내렸다 한다.


그러던 중, 측근 내신인 조고의 전횡을 눈치채지 못하고선 순행길에 명을 달리하였고, 이세황제에 들어서는 그의 모진 행실에 눈을 감으면서 다시 세상이 어지러워졌다 한다.


그때, 진승이란 사람이 봉기를 일으키며 한 말이,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였다 한다.
혹자는 신분질서와 계급체계 등 낡은 체제를 타파하자는 급진적인 외침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지마는, 그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인 없는 점과 봉기를 하게 된 배경이 나라의 처벌이 두려운 나머지 저지른 과감한 행보라는 점, 향후 진승의 권력구축의 행보 등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왕후장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니, 나도 왕 노릇을 해보고 싶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어쨌건 가진 재주를 열심히 쏟아부어, 짧으나마 왕 노릇을 하긴 하였더랬다.


몇 해 전 재밌게 보았던 「관상」이라는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이 또 다른 주인공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내가 왕이 될 상인가?”하고 묻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두 번이나 그렇게 물어보는데, 한번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뒤에서 일을 도모하면서 관상가를 떠보기 위해, 다시 한 번은 역모가 성공하여 정해진 상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 보이고 나서이다.


삶이 복잡하고 고단한 나머지 우리는 쉽게 어딘가에 의지하려는 본성을 갖게 되었던 듯싶다.

인류 나름의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유를 들어서 왕후장상의 당위성과 위계를 정해 부여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이래이래 요목조목 생기면 왕이 될 귀한 생김새이니 소중하게 대하라고 정해두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인류가 꾸린 사회에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사회가 유지될 가능성이 더 커지는 효과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전근대의 사회만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만히 뉴스 한 켠을 이리저리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탈을 쓰고서 어떻게 저런 일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싶은 때가 종종 있다. 속으로 실컷 욕지기를 뿜어내고 나면 왜인지 그때부터는 내가 세상 가장 정의로운 사람으로 느껴지며 아주 손쉽게 내 머릿속에서 단죄를 하곤 한다.
“이 죽일 놈!”

잠깐만 그 단죄의 칼을 내려두고 조심스레 자신에게 물어보자.
과연 나는 매사에 정의로운가?
과연 나는 완벽하게 완벽한가?

아마도, 완벽한 존재라면 완벽하지 않은 것임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질문들을 곱씹다 보면 이내, 나는 정의롭지 않은 자들을 한눈에 알아볼 재간이 없고, 시공을 초월하여서도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낌새를 차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나는 매사에 정의롭다기보다는 보다 정의로워지기 위한 선택들을 강요받는 존재에 불과하다.

나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것을 명료하게 알아차릴 재간이 없다.


내가 쉽게 싸잡아 욕하는 주변의 많은 일들과 사람들은, 놀랍게도 나와 똑 같이 평범한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쯤 되면 내려놓은 칼날을 은근슬쩍 발로 밀어, 구석에 처박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옳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그 모든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안아줄 용기도 내게는 없다. 마땅히 벌을 내리고 반성을 끄집어내야만 할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범주에 속하는 일원으로서 정의롭지 못한 일로 빠져들지 않도록 어떻게 나를 채찍질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 세월 삶을 꾸려가다가 어느 정도 때가 무르익게 되면, 나름의 경험으로 쌓인 빅데이터들이 유의미한 메시지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해라.”라든지,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등과 같은 말들처럼 옳거니! 하는 순간들 말이다. 말뿐만 아니라, 태도나 생각이나 행실 역시 그러하다.


운이 좋아서 모진 풍파를 잘 견디어 소위, ‘잘 살게 되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유난히 더 본인의 경험과 성과물들을 맹신하는 경향이 자라난다.

그에 따라 거의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일들이 생기곤 하는 것 같다.

“나의 삶의 방식이 옳아. 지금의 내 위치와 성과들이 그걸 증명하잖아.”

라고 하듯이 말이다.


위험하다.

사람이 비겁해지는 순간은 공교롭게도, 내가 비겁하지 않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순간, 나는 원균의 후예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고 만다.

오히려, 이렇게 살아서는 충무공을 뵐 낯이 없다고 여기면서 매 순간을 반성하고 채찍질하는 사람만이 역설적이게도 조금씩 그분에 육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내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몫이지, 결코 내 몫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고, 왕이 될 상이 따로 있지 않듯이, 비겁하고 비정하고 부도덕한 일을 할 상이 따로 있지 않다.


그저 자전거 페달을 연신 밟아야만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매 순간을 정성껏 힘겹게 살아내야만 겨우 정의로움을 향해 힘겨이 다가가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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