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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모아

일백 예순 하고도 여덟 계단

계단문학상 공모전 투고작품('25년 5월)

by 서용훈

(부산 동구 초량동 옛 피란민촌에 위치한 168계단과 관련한 글을 공모할 때 제출했던 글입니다.)

그 시절, 아비와 어미들은 수만 번은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열리는 이곳 부산. 인류사 부조리에 떠밀려 기약 없이 도착한 사람들.

6·25 전쟁, 그 환난 속 피난의 발걸음들은 여기서 멈춰 섰다.


야트막하여 손이 닿을 만한 곳들은 이미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이 빼곡했다. 몰려든 피난 행렬은 월동장작 마냥 산기슭에 기대어 켜켜이 쌓여 올려졌다.


능선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선 판잣집들은 구봉산을 에워싼 갑옷과도 같았다. 그 미늘을 뚫고 빼곡히 고개를 내미는 것은, 배고픔을 비롯한 생존의 본능들이었으리라.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생계의 심장으로 향했다. 부산항과 부산역.


그곳은 생과 사의 냉정한 현실에 한 가족의 명운을 온전히 떠맡기는 일종의 승부처였다. 동이 트면 각자가 아는 한 가장 분주하게 움직여 닿아야만 했다. 능선을 돌아갈 만큼의 느긋함은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생의 열기는 최단경로로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168개의 계단은 생존의 비탈이자, 공동의 체온으로 빚은 길이 되었다.



아비의 단단한 구릿빛 팔뚝은 지게막대기를 움켜쥐고서 기꺼이 폭포의 물줄기가 되었고, 맹렬한 행렬 속으로 직선으로 쏟아져 나갔다. 콸콸콸.


어미는 아랫말 우물가에서 물동이에 가득가득 찬물을 담아, 몇 번이고 수원지에 채워 넣기 빠듯하였다. 새벽별 아래 폭포였던 이곳은, 이제 계곡이 되어, 한 방울이라도 더 물을 재 올리기에 바빴다.

굳어버린 고난과 우물터


모질게 내리쬐는 뙤약볕과 사포 같이 거친 현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같은 조건이었으니, 그나마 위안이었을까?



너희들만은 이런 험한 세상에 뒤틀리지 말고 밝게 살으라.

오랜 소망을 담아 지은 아이들의 이름은 광명, 희망, 미래.


늦도록 오지 않는 아비와 어미를 목 빼고 기다리며, 차곡차곡한 계단 사이사이 오색 분을 칠하였다.

자녀들을 어깨에 얹은 아비와 어미의 운명이란 것은 대개 그렇듯이, 날이 어둑해지도록 되돌아올 줄 모를 여정 위에 놓여 있었다.

켜켜이 쌓인 장작더미 같은 일백 예순 하고도 여덟 계단.

천지에 어둠이 내리면, 갯비린내 나는 외투를 툴툴 털어내며, 퉁퉁 부어터진 다리를 채근해 가며 본능처럼 오르던 그 길. 삐뚤빼뚤 포개어 있는 모양새는, 온갖 세월을 다 빚어낸 손마디의 주름과도 같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계단을 오르며 아이들의 기다림이 담뿍 뭍은 오밀조밀한 그림조각들을 이정표 삼아 타박타박 계단을 오른다.


그 시절, 이 계단은 생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던 터널이었고, 같은 아픔을 머금은 사람들 간의 연대의 길이었다. 계단은 가정과 일터를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생김새 자체로 이미 굴곡진 현대사를 질타하는 듯한, 통쾌하기 그지없는 폭포 같은 곳.



지금은 젊은 청춘들이, 가족들이 그곳을 웃으며 오른다. 더는 갯비린내가 진동하지 않는다.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다리가 퉁퉁 붓지도 않는다.


생의 열기와 절박함, 땀냄새, 기다림의 애잔함, 이 모두가 한데 얽혀 폭포처럼 쏟아지던 곳.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추억 속의 그림이 되었다.

하루하루 절박한 발걸음이 만든 가파른 계단길이, 광명이 되고 희망이 되어 미래로 내닫고 있는 지금은, 눈부신 풍광을 품은 정감 있는 산책길이 되었다.

일백 예순, 하고도 여덟 계단.

세어보세요. 168계단 / 빨간 엘리베이터


오늘 우리는 그 위를 걷는다.


어제의 삶을 딛고, 내일로 향하는 공간을...⚓️




(아쉽게도 계단문학상은 낙첨되었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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