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슬픔과 비루한 자아. 도피의 연대기
나는 별에서 뚝 떨어진 사람인가 싶었다.
나는 학창 시절과 유년기의 기억이 거의 없다.
옛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눠도, 기억상실이라도 있는 사람 마냥 머릿속이 뿌옇게 흐리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되는 대로 살다가는 건강도 잃겠구나 싶어서 운동삼아 동네 뒷산을 오른 적이 있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다독이며 숲길을 걷는데,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의 단편이 떠오르며, 자못 생생한 느낌마저 들어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마치, 기억의 덩어리가 내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다만 무언가엔가 가려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노동력으로 만든 아파트 숲이 되었지만, 어렸을 적에 살던 동네는 지구가 만든 숲이 제법 울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덩치가 아직은 조막만 하던 시절의 눈으로 본 기억인 관계로, 남아있는 이미지에 왜곡이 있을 테지만, 숲을 가운데 품고 있는, 작은 생태계가 갖춰진 곳이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그런 숲은 흔치 않고, ‘마을’이라든지 ‘동네’와 같은 이름을 붙이는 곳도 드물다. 어릴 적에는 동구 밖, 뒷산, 마당, 개울, 건넌방, 마루, 요강 같은 단어들이 손에 닿을 거리에 즐비했었다.
그런 시골마을에도 어린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학교에서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매주 단위로 오전반과 오후반을 번갈아 등교하는 일이 어린 내겐 무척 번거롭고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나이가 이만큼 들고 보니, 40명 넘는 아이들을 오전과 오후에 각기 마주해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충은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다.
오전반인 주간에는 우리 집도 여느 집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주는 밥을 챙겨 먹고, 허겁지겁 마을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걷거니 뛰거니 하며 등교를 했고, 하굣길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는 냅다 동네를 휘저으며 뛰어놀기 바빴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놀이터인 일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버려진 나뭇가지만 있어도 누구보다 신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오후반 주가 되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엄마 갔다 올 테니까, 이따가 상 위에 차려둔 거 먹고, 시간 맞춰서 학교 잘 다녀와야 해!” 하는 당부로 하루가 시작되고, 어디에 이리도 급히 가시는 걸까 궁금하여 묻기라도 하면,
“애들은 몰라도 돼. 너는 학교 잘 다녀오고, 엄마 말 잘 들으면 돼.”
하며 얼버무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신다.
어머니의 분주한 출타 이후에는, 설명하기도 애매한 묘한 느낌의 정숙이 사방을 에워싼다. 혼자 노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마을을 빙글빙글 돌아보지만 이미 마을의 절반 넘는 친구들은 학교 오전반에 가 있어서 부재중.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차려두신 밥상을 본다. 밥상보가 덮여있어 안에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처연한 눈빛을 마주하기 싫다는 핑계로 피해 다니던 식감 거친 멸치볶음이 있을까?
좋아하기는 하지만, 혼자서 만들 때면 늘 껍데기가 바사삭 씹히던 계란프라이가 있으려나?
두근두근.
모두 틀렸다. 오늘은 오징어 뭇국과 김치다.
오징어 뭇국에 오징어는 없다.
오징어의 오동통하고 쫄깃한 살은 아직 활용되지 않고 부엌 어딘가에 고이 모셔져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불그스름한 색감과 바다의 감칠맛을 내기 위해서 마른오징어의 껍데기를 잘 벗겨내어 활용한 ‘오징어 껍데기 뭇국’이 올바른 표현이렸다.
다 식은 오징어 껍데기 뭇국에 밥을 후루룩 말아서 뚝딱 해치운다. 사실, 점심식사로 차려주신 음식이지만 요새 식으로 따지면 브런치 식으로 이른 시간에 소비해 버린 것이다.
남은 김치는 찬장에 뚜껑을 덮어 넣어두고 비어버린 밥그릇과 국그릇은 소쿠리 안에 넣어 정리해 두었다. 이 정도면 꽤나 준수한 가정교육
옆 마을에 사는 단짝 친구와 일찌감치 만나서 소요하다가 등교하기로 한 것이다.
가방을 들쳐 매고는 뒷산을 향한다. 포장된 길을 따라가면 학교가 바로 나오고, 걸어간 만큼을 옆길로 재차 돌아야만 친구집이 나오는 까닭에 뒷산을 가로지르기로 한 것이다. 삼각형의 특성을 생각한 지름길이라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영민함이랄까?
초여름에 접어든 숲길은 온갖 풀들이 무성하다.
이건 강아지풀, 저건 엉겅퀴, 그건 칡, 요건 오디나무... 하며 세심하게 알려준 어른들이 주변에 없었거니와, 나 자신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온통 초록으로만 기억에 남아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한낮인데도 숲은 어둑어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애용하던 산인 탓에, 양껏 자란 풀들도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컸다. 덕분에 이 영민한 시골아이도 숲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고 쉬이 방향을 더듬어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길이 눈에 익은 것과는 별개로, 숲이 깊어질수록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조금씩 바빠졌다.
얼만큼 걸었을까? 주인집 앞마당 만한 크기의 공터가 나온다. 빼곡하던 나무들이 거기만큼은 자리를 내주어 자그마한 광장을 만들어 주었고, 울창한 나뭇가지와 나뭇잎들로 손에 손 잡아 높은 지붕을 만들어 내었다. 맞잡은 나무의 손틈들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려 너른 풀밭의 군데군데를 비추고 있었다.
가뿐 숨을 고르며,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내 숨소리가 잦아드니, 그제야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귓불을 스친 바람이 저 멀리 나뭇가지를 만지고서 멀어져 가는 소리도 들린다. 그 바람을 타고 나비가 살랑살랑 풀꽃 사이를 춤춘다.
꿈속을 거니는 듯한 몽롱한 착각이 삼십 년도 더 지나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다. 한동안 빛을 맞고, 바람에 쓸리우면서 눈으로 나비를 좇자니, ‘언젠가 소풍을 와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길을 나서니 어둑어둑한 꽃나무 터널이 나온다.
타박타박 걸어가는 길 저 멀리에 밝은 초여름 햇살이 가득하다. 끝이 보인다.
지름길 끝자락에 환하게 밝아오는 새로운 시각적 정보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날아와 꽂힌다. 명순응 하느라 눈을 찡그린 사이 더듬더듬 포장된 도로 위로 발걸음을 내딛자 저 멀리 개울 너머 초록 지붕의 친구 집이 눈에 들어온다.
단짝 친구와의 오전 시간을 흡족하게 소요하고, 빙 돌아가는 등굣길을 굳이 택하여 발을 재촉한다. 오전에 느낀 묘한 고요의 빈 공간을 채우기라도 하듯, 종일 재잘재잘 떠들고 깔깔 웃고 떠들었다.
길가 강아지풀을 뜯어 들고는 돌멩이를 툴툴 차대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마당 밖에서부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동생이 혼자서 마룻바닥에 앉아 울고 있었다. 보통은 어머니와 함께 있을 터였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에 뛰어들어 달래 보았다.
“경찰 아저씨들이 엄마를 데리고 갔어.”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아 동생 어깨를 부둥켜안고서도 멍하게 앉아 있었다.
뒤이어 들어온 주인집 아주머니를 비롯한 이웃 어른들의 대화가 아득하게 들려왔는데, 당시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아이고, 애들은 어쩌라고 새댁을 잡아가길 잡아가? 신도신지 뭣인지 간에 지들이 먼저 시작한 싸움 아니냐고!”
도시면 도시지 신도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그게 왜 이사를 가야 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의아한 건 그게 왜 어른들이 애써 싸워야 하는 일인가였고, 더더욱 아리송한건 그 모든 것과 우리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결국 알 수 없는 의문들 속에서 어린 나도 덩달아 울음이 터졌다.
어머니는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돌아오셨고, 울먹이는 두 형제에게 밥을 지어 먹이며 말씀하셨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너희 형제는 엄마 말 잘 듣고, 씩씩하게 잘 놀면 돼.”
더 캄캄해진 밤이 되자 마당에서 익숙한 소음이 이어진다.
불을 끄고 이불속에서 자는 척 누워있어도 먼발치 마당 너머 들려오는 걸음 소리와 패턴만으로도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
다음은 어김없이 고성이 오갔다.
술이 있는가. 정신은 있느냐. 상을 봐오라. 처자식과 앞은 보이느냐....
비슷한 패턴의 언쟁 이후에는 또 무언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와 동생은 이불속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떨고, 또 울다 지쳐 이내 조용히 귀를 닫고, 머릿속을 더듬어 숲길을 되짚어 올라간다. 다시금 빛줄기가 우아하게 나를 감쌀 때까지 그 공터를 찾아 헤매어 본다.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잎사귀들의 사각사각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저 멀리 들리는 고성과 악다구니를 애써 덮는다.
어느 날엔가는 그 숲의 언어를 뚫고서 어머니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 잽싸게 날아와 사방에 부서지기도 하였다.
“내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갈라섰을 거야. 이 무책임한 인간아!”
어린 나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는 것이 최선의 표현인 듯하다. 어머니의 슬픔에는 나와 내 동생의 지분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파편으로 불규칙하게 날아든 어미의 원통에 새끼들도 그만큼 슬펐나 보다.
커져가는 살기 어린 말들과 반비례하여 나는 점차 작아져만 갔다. 개미만큼 작아져 숲 속으로 매번 뛰어들었고, 숲길 위에는 짙은 안개가 층층이 덧입혀졌다.
켜켜이 쌓인 무형의 장막들은 끝내, 내 점심몫을 덮어두던 밥상보처럼,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 둘, 시나브로 갈무리하였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무심결에 내가 차곡차곡 쌓고 덮어 놓아두는 통에 내게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우연한 계기에 전구를 켜듯이 팍 하고 드러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또, 질문은 늘어만 간다.
내 기억의 밥상보 아래는 무엇이 더 감추어져 있을까?
들추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꽁꽁 숨겨놓은 내 삶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는 것일까?
늘 '나 다운 것'을 갈망하는 내 모습도 아마, 과거 없음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기억을 더듬어 가면, 거기에는 진정한 내가 기다리고 있을까?
반복된 슬픔으로 인해 끝내 비루해져 버린 내 안의 어린이를 이제는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잘 버텨왔어. 이제 그만 이 밥상보를 걷어 올려 보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지 않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