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톡스 PM(Product Manager,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면서 제일 무서운 게 '품절'이다. 제 아무리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도, 북극에 냉장고를 팔아치우는 영업부가 있어도, 팔 제품이 없으면 다 헛 일이다.
마케팅 PM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Demand Forecasting, 일명 수요 예측에 따른 재고 관리다. 월, 분기, 연도별 예상 매출보다 너무 많이 생산하면 재고로 쌓여서 KPI 점수가 깎인다. 그렇다고 너무 타이트하게 생산하면, 품절이 나서 매출도 빵꾸나고 영업부한테 욕도 푸지게 먹는다.
솔직히 말하면, 품절을 내느니 차라리 넉넉히 생산했다가 KPI 점수를 깎이는 편이 더 낫다. 그만큼 품절은 치명적이다. 일단 제품이 부족하면, 매출을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고객 이탈이 발생한다. 2021년 기준 국내에 유통되는 보톡스 브랜드만 10개. 내 제품이 품절 나면, 고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머지 9개 브랜드 영업사원에게 전화한다. 이탈된 고객을 찾아오는 것은 너무나 어렵기에, 품절 공지가 뜨자마자 PM의 전화는 영업부의 클레임으로 불이 난다.
이유 있는 품절
가끔 영업사원들이 말한다. 품절 안 나게 재고 좀 많이 쌓아두라고. 생산만 많이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고.
나도 그러고 싶다. 근데, 그게 가끔 어렵다.
보톡스 비즈니스는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국가출하승인제도
식약처 홈페이지 내 '국가출하승인제도' 설명문
쉽게 말해서, 보톡스를 국내에 팔고 싶으면, 생산할 때마다 식약처(식품의약품안전처)에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거다.
보톡스(보툴리눔 톡신)는 생물학적 제제로써, 국가출하승인 관리 품목이다. 생물학적 제제는 동물이나 미생물에 의한 생물학 공정에 의해서 생산된 의약품을 말한다. 똑같은 화학식으로 찍어내는 알약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을 원재료로 한다. 때문에 원재료의 컨디션에 따라서, 추출하는 약품용 단백질의 양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품질의 의약품을 유통하기 위해서, 식약처는 국가출하승인제도를 통하여 생산되는 모든 보톡스의 품질을 사전 검사한다.
가끔, 식약처의 국가출하승인 일정이 예상보다 지연되면, 생산된 보톡스를 팔지 못한다. 즉, 품절이 난다.
보톡스(보툴리눔 톡신) 원재료 확보, 제품 생산, 국가출하승인, 판매까지의 과정
PM을 위한 변명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약처의 국가출하승인 일정 지연은 1~3일 정도다. 하지만 단 1일이라도 품절이 돼버리면, 그 하루 동안의 고객은 이탈된다.
안타까운 것은, 국검(국가출하승인검사)일정이 지연돼도 PM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식약처 국검 승인이 나기 전까진 공장의 생산 물량을 서울 창고로 옮길 수도 없다. 보통 1개 생산 단위(Lot)의 물량은 적게는 3,000개에서 많게는 몇 만개. 그 많은 수량을, 국검 승인 전까진 팔 수 없는 거다.
그래서 보톡스 PM은 전투적인 자세로 생산 계획 회의에 임한다. 보다 정확한 재고 관리를 위해서. 하지만, 가끔은 PM도 어쩔 수 없는, 품절이 날 수밖에 없다. 보톡스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비즈니스 때문이다.
2020~2021년에는 그 어느 때보다 보톡스 품절이 잦았다. 코로나 19 백신 국검 승인에 모든 식약처 직원이 집중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의약품의 일정이 밀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