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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Dec 19. 2021

유럽, 학회, 출장

내게도 직장인의 로망이 있었다.

엄마, 나 유럽 출장 간다


퇴근까지 참지 못하고, 카톡을 보내버렸다. 5개 단어로 이뤄진 짧은 한 줄이지만, 내 가슴은 두근거림에 터질 것 같다. 해외 출장, 유럽, 프랑스, 파리. 20대 여자라면 누구라도 설렐,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상징과 같은 단어들. 팀장의 출장 지시를 받고 뒤돌아선 순간, 그게 나라는 것을 확인한 그 순간,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긴 머리 휘날리며 구두 소리 또각또각 인천공항 로비를 가로지르는 성공한 회사원, 그게 바로 나였다.


- 출장? 언제?

- 1월 말. 파리에서 큰 학회가 있대. 파트너사에서 유저 미팅을 연다구, 우리 회사도 참석하래.

- 누구랑 같이 가? 너 혼자?

- 응, 나 혼자. 내가 마케팅 담당자니까, 당연히 내가 가야지.


기쁜 마음은 똑같지만, 머리에 떠오른 다음 생각은 둘이 달랐다. '담당자', '당연히 내가 가야지'라는 말에선 내가 갈 수밖에 없는 핵심 인재라는 자부심이 보였고, '언제', '혼자'라는 단어에선 딸을 해외에 보내는 부모의 앞선 걱정이 보였다. 나는 '당연히'라는 단어만 콕 찝었다. 그리고 내가 갈 수밖에 없도록, 장문의 출장 계획서를 작성했다.



2017 IMCAS(International Master Course of Aging Science)
보톡스, 필러 등 미용성형 학회의 양대 산맥.

2017 IMCAS Paris, Palais des Congres



1st Day. (26 Jan, 2017)


오늘의 일정
 
1. 파트너사 미팅 (인사, 명함 받기, 보고서용 셀카 찍기)
2. 경쟁사 활동 업데이트 (보고서용 사진 찍기, 브로셔 수집하기)


#1. 파트너사 미팅

학회 첫날이라서, CEO부터 마케팅 매니저까지 모든 사람이 부스에 나와있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안면이 있는 매니저에게로 갔다. 매니저는 크게 환영하며 내 볼에 서양식 키스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를 CEO에게 데려가서 인사를 시켜줬다. (안 그래도 명함을 받고 싶었는데, 정말 고마웠다.) CEO, 마케팅 디렉터, 개발 디렉터 등 인사와 명함 수집이 이어졌다. 출장 보고서에는 '파트너사 업무별 실무 총괄 책임자 커뮤니케이션 채널 확보'로 쓰면 되겠다.


부스 안 쪽 미팅 테이블에 매니저와 마주 앉았다. 오는 길은 어땠니, 호텔은 편하니 등 간단한 Small-talk를 나누고, 이번 학회의 주요 이벤트 일정표를 공유받았다.


- 첫날이라 피곤할 테니, 우리 자세한 미팅은 내일 하자.


역시 매니저는 배운 사람, 매너가 있다. 보고서용 & 기념용으로 매니저와 셀카 한 장 찍고, 오늘의 파트너사 미팅은 종료.



#2. 경쟁사 활동 업데이트 Ver. 1

학회장을 둘러보며, 주요 경쟁사의 부스 사진을 찍는다. 각 경쟁사별 홍보 부스 전체샷, 부스 이벤트 운영샷 총 2장을 찍고, 인포데스크에 비치된 홍보 브로셔와 리플렛도 3개씩 챙긴다. (내꺼, 팀장꺼, 사업부장꺼) 학회 프로그램북에 경쟁사별 Sponsored Symposium 일정, 제목까지 표시하면 끝. 출장 보고서에 5개 페이지 정도는 채워 넣을, '경쟁사 마케팅 활동 업데이트' 세션 자료수집이 완료됐다.


크고 넓게, 혹은 화려하게. 방문객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다양한 부스 디자인들.



2nd Day. (27 Jan, 2017)


오늘의 일정

1. Sponsored Symposium (English Listening)
2. 경쟁사 활동 업데이트 (한국 경쟁사 위주로, 보고서용 사진 상세하게 찍어오기)
3. 파트너사 미팅 (★★ 이번 출장의 메인이벤트)


#3. Sponsored Symposium

가장 큰돈을 쓴 회사에게만 주어지는, 1시간의 제품 홍보 시간. 경쟁사의 마케팅 메시지 염탐을 위해서 Sponsored Symposium에 들어왔다. 5명의 강연자가 돌아가면서 경쟁사 제품 사용 후기와 임상 케이스를 발표한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영어 Listening 와중에, 강연자 한 명이 한국 의사임을 발견. 강연이 끝나자마자 얼른 뛰어가서 C사 직원이라 인사하고 명함을 받았다. 같이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무뚝뚝한 한국 의사는 바쁘게 가버리고.. 나는 'A 회사 KOL Dr. B 원장 면담. A 제품에 대한 강연 진행했으며, 귀국 후 담당 영업사원과 동행 방문 예정'이라고 메모해뒀다.



#4. 경쟁사 활동 업데이트 Ver. 2

이번엔 한국 경쟁사 중심으로 학회장을 다시 둘러본다. 올해 IMCAS(International Master Course of Aging Science) 학회에는 총 3개의 한국 경쟁사가 참가했다. 특히, H사는 새로운 보톡스 제품을 출시했는데, 이번 학회에서 첫 선보인다. H사의 부스 디자인, 신제품 패키지, 홍보 메시지 등 산업 스파이에 빙의하여 몰래 & 꼼꼼하게 사진을 찍고, 홍보 브로셔도 뭉텅이로 챙겼다. 'H사 보톡스 신제품 출시에 대한 경쟁사 마케팅 동향 파악' 정도로 보고서 소제목을 잡으면 되겠다. 퇴사한 전 직장 동료한테도 유용한 정보일 테니, 귀국하면 밥 한 끼 거하게 얻어먹으면서 공유해줘야지.



#5. 파트너사 미팅 (★★)

이번 출장의 메인이벤트를 앞두고, 법인카드로 점심도 든든히 먹어뒀다. 파트너사 부스를 재방문하여, 마케팅 매니저와 미팅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본격 미팅 시작. 부족한 영어 Speaking을 도와줄 PPT 자료도 칼라 출력해왔다. 작년 출시 후, 반년 동안 한국 시장에서의 매출이 어땠는지, 내가 이걸 팔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각종 마케팅 이벤트와 홍보물 사진을 보여줬다. Good, Excellent 외국인 의성어에 한껏 고무된다.


이제 진짜 프리젠이션. 올해의 마케팅 계획을 소개하며, 이걸 다 하기 위해선 너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지원 요청을 했다. Good, Excellent 의성어가 사라졌다. 매니저가 뭐라뭐라 말하지만, 난 무조건 우긴다.


- 우리 작년에 론칭했고, 너무 큰 예산을 썼어. 너네 지원 없으면, 올해는 작년만큼 마케팅 못해.

- 이 매출 그래프를 봐봐. 엄청 좋지? 너네가 지원 안 해주면, 우리 이거 못해.


결국 우격다짐이 이겼다. 매출 타겟 고객을 위한 Trial Sample을 지원하겠다고, 매니저의 대답을 받아냈다. 이제 됐다, 이번 출장은 이미 성공이다! Thank you 하다고 인사하며, 오늘 미팅 내용은 내가 정리해서 이메일 보내주기로 했다. (나중에 딴소리 못하도록)



3rd Day. (28 Jan, 2017)


오늘의 일정

1. 파트너사 행사 'International Distributor Meeting' 참석 (한국에 적용할 것 메모하기)
2. 파트너사 행사 'Vivacy Night' 참석 (글로벌 회사는 이런 이벤트를 하는구나 사진 찍기)


#6. 파트너사 행사 'International Distributor Meeting'

글로벌 회사는 이런 행사도 하는구나. 세계 각국 파트너사 마케팅 담당자를 한 자리에 모아서, 올해 우리 제품이 추구할 'Brand Road-Map'을 교육한다. 올해 어떤 신제품을 출시하는지(추가 계약하자), 포장 자재엔 뭐가 추가되는지(밀수하지 말고 너네 나라에만 팔아라), 새로운 마케팅 타겟은 무엇인지(매출 더 해라), 마케팅 메시지는 무엇인지(너네 홍보물도 업데이트해라) 등등, 본사의 브랜드 헤게모니를 통제하는 자리였다. 더불어, 국가별 올해의 성과를 소개해서 글로벌 경쟁도 부추긴다. (2016년 한국의 성과는 Grand Launching 이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며, 글로벌한 박수 세례를 받았다.) 언젠가, 내가 본사 마케팅 담당자가 된다면 꼭 도입해볼 것이다.


글로벌 회사가 브랜드 헤게모니를 통제하는 방법, International Distributor Meeting



#7. 파트너사 행사 'Vivacy Night'

글로벌 회사는 이런 행사도 하는구나 Version 2. 파리 시내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로비부터 4층까지 전부 파트너사의 로고 색깔, 이미지로 꾸몄다. 컨셉은 Welcome to Vivacy. 모든 참석자 앞에는 샴페인 한 잔이 놓이고, 안에는 진짜 or 가짜 다이아몬드가 숨겨져 있다. 이벤트 존의 감정사에게로 가져가면, 진짠지 아닌지를 감정해주는 이벤트. 아이디어가 참 좋았다.


글로벌 브랜드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인지도가 낮을 수 있다. 그런 국가에서 온 마케터의 사상을 뿌리부터 개조하려는 듯, 우린 이런 회사야 너가 파는 제품이 이렇게 빅 브랜드야 라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여준다. 2017년 Vivacy의 메시지는 'From Paris'로, 포장 자재에도 에펠탑 이미지가 새롭게 표시된다. Made in France가 브랜드 이미지라니, 그 과감한 발상이 납득되면서 부러워졌다.


샴페인 잔에 들어있는 진짜 다이아몬드를 찾는 이벤트. 아이디어가 참 좋았다.



4th Day. (29 Jan, 2017)


오늘의 일정

1. 파트너사 미팅 (Good bye 인사하기)
2. 휴식, 귀국 준비 (해외 출장의 묘미)


#8. 파트너사 미팅

학회 마지막 날. 오늘은 놀면서 휴식할 계획이지만, 회사원 마음의 족쇄가 날 다시 학회장으로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파트너사 부스에 방문해서, 초대해줘서 고마웠다며 올해도 잘해보자고 의례 인사한다. 매니저가 수고했다고, 판촉물을 한 아름 안겨준다. 회사원이라서, 출장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이 충만하다.


#9. 휴식, 귀국 준비

점심과 오후 시간이 비었다. 어젯밤 내내 뭐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기로 결정했다. 1월의 파리 날씨는 추웠고, 롱패딩에 파묻혀서 거리를 전전하고 싶진 않았다. 이번 출장길에서 처음으로 내 개인카드로 입장권을 결제했다. 롱패딩을 맡기고, 후드티에 청바지 운동화로 가볍게 회화 전시관을 구경한다. 비즈니스, 출장, 미술관. 참 아름다운 단어 조합이다.



다시, 한국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귀국길이 바쁘다. 밤새 출장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공항에서 부랴부랴 기념품을 구입했다. 어차피 잠은 비행기에서 자면 된다.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면서, 내 여권에는 Paris Out 도장이 찍혔다. 삶의 버킷 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픈 유럽 출장. 여권에 그 기록을 남기면서, 지친 몸과 한편엔 후련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벌써 7년 전 이야기다. 이제 나는 30대 중간 관리자가 되었고, 더 이상 20대와 같은 회사 생활의 로망을 꿈꾸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특히 유럽 출장이란 단어에는 아직도 약간의 설렘이 남아있다. 멋있어서, 핵심 인재의 자부심을 느껴서가 아니다.


무심한 척 무표정한 내 얼굴 뒤에는, 아직도 해외 출장을 동경하던 20대의 몽글몽글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몽글몽글한 두근거림이,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지탱해준다. 40대, 50대가 되어도 회사 생활에 대한 로망 한 조각을 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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