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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Jan 05. 2022

새로운 아이디어는 힘들다

막내 마케터의 판촉물 제작기

* 본 글에 명시된 보톡스는 앨러간 브랜드가 아닌, 보툴리눔 톡신의 일반 명사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막내야 판촉물 좀 만들어봐라. 새로운 걸로."



마케팅팀 막내로서 받은 첫 미션은 학회 판촉물 제작이었다. 자고로 별로 안 중요하지만 수고로운 일이 막내에게 배정되는 법. 학회 판촉물이 딱 그랬다.


- 표면상 별로 안 중요함. (잡일 취급)
- 아이디어는 다양함. (그러니까 젊은 감각의 막내가 해봐라)
- 기왕 하는 거 좋은 거 만들어라. (공짜라지만 우리 브랜드 홍보물인데 별로여서 되겠어?)
- 근데 싼 걸로. (판촉물에 돈들이지 마라)
- 학회 일정은 꼭 맞춰라. (빨리 해라)


원래 신입은 크던 작던 따지지 않고 열심히 하니까 예쁜 거다. 잡일로 치부되는 판촉물이지만, 판촉 마케팅 개념부터 공부하면서 정말 열심히 고민했다.



회심의 역작, 보톡스 박하사탕


* 판촉: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수요를 불러일으키고 자극하여 판매가 늘도록 유도하는 일
* 판촉물 광고: 소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물건을 판촉물로 이용하는 광고


판촉 마케팅 & 다른 회사 예시를 찾아가며,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 째, 의사가 딱 보고 우리 브랜드를 생각할 수 있을 것.
둘째, 돈 주고 사기엔 아깝지만 누가 주면 갖고 싶을 것.


그래서 '보톡스 사탕'을 기획했다. 보톡스 병 모양으로 플라스틱 통을 만들고, 우리 브랜드와 똑같은 라벨로 디자인했다. 안에는 작고 하얀 박하사탕을 채웠다. 제품을 본땄으니까 브랜드 홍보도 쉽고, 긴 학회 시간 동안 텁텁해진 입을 상쾌하게 해줄테니 실용성도 갖췄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학회 끝나고 영업부도 사용할 수 있도록 양도 충분히 만들었다.


보톡스 디자인의 플라스틱 통과 라벨을 만드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간신히 학회 일정을 맞췄다. 1박스에 100개씩, 마케팅 창고를 꽉 채운 50박스의 첫 기획물. 신입 마케터의 땀과 노력, 뿌듯함까지 꽉꽉 채워서 첫 학회 장소로 보냈다.



무너진 역작, 상처받은 마음



토요일 아침 8시. 학회장은 코엑스였다. 또각또각 대리석을 울리는 하이힐 소리가 설렌다. 회사 부스에 도착하니 영업부 시절 선배 2명이 벌써 나와있다. 반갑게,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 마케팅 갔다고 이젠 선배보다 늦게 오네?

- 선배가 일찍 온 거죠! 난 제시간에 왔어요.


수북한 박스를 열면서 부스 오픈을 준비한다. 브로셔, 강의 안내 리플릿, 그리고 회심의 역작 사탕 판촉물. 매번 똑같은 볼펜, 물티슈가 아니라며 선배들이 먼저 알아봤다. 가슴이 1차로 두근두근. 뭐야, 보톡스야? 이게 뭐야? 물음에서 2차 두근두근. 오, 사탕이네! 새로 만들었나 보네. 3차로 두근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 이번에 새로 만들었어요. 어때요, 괜찮죠?

- 신선하네. 근데 볼펜은 없어? 거래처 원장님이 찾는데, 안 갖고 온 거야?

- 이거 박하사탕이지? 입이 맵다. 왜 박하로 했냐? 사탕은 역시 오렌지 맛이지.

- 너 영업부에 뭐가 필요한지 몰라? 마케팅 갔다고 변했네.


입엔 내가 만든 사탕을 물고, 밖으로 나온 말은 내 마음을 후벼 팠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마케팅 갔다고 변했다는 말.


맨날 판촉물 똑같다고, 남들 다 하는 볼펜/물티슈 말고 다른 건 없냐던 선배들이었다. 마케팅이 판촉물도 많이 안 줘서 원장님 만나기 민망하다던 선배들이었다. 그런 영업부의 어려움을 나도 알기에, 일정 딜레이 된다는 구박을 견뎌가며 새롭고, 실용적이고, 양 많은 판촉물을 만들었다. 사탕에 돈 써야 되냐는 재무팀장을 설득하면서 과장, 팀장, 영업부장, 재무팀장, 본부장 결재까지 받아냈다. 플라스틱 통에 사탕을 일일이 직접 넣어야 한다는 에이전시의 불평을 달래가며, 어떻게든 일정에 맞춰서 만들었다.


내가 영업부 출신이기에. 영업의 고충을 잘 아는 마케터가 되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고민했는데.. 내 노력에 비해서 너무 쉽게 내뱉는 선배의 투덜거림에, 신입 마케터의 마음은 무너졌다.



'판촉물' 미션은 성공, 지쳐버린 기획자



학회는 잘 끝났다. 다른 회사는 항상 똑같은 볼펜, 물티슈를 들고 나왔고, 덕분에 보톡스 박하사탕은 더 인기 있었다. 오렌지맛 아니라고 투덜거리던 선배는 자기 거래처 갖다 준다며 박스 채 가져갔다. '새롭고 창의적인 판촉물' 미션은 성공이다. 그런데, 난 상처받았다.


지금은 나도 볼펜, 물티슈 판촉물을 만든다. 코로나 19를 맞으면서 마스크와 손소독제도 추가했다. 너무 힘 빼지 않고, 기성품에 브랜드 로고 스티커만 붙이니까 참 편하다. 결재도 빠르고 일정도 넉넉하고, 판촉물이 무난하니 영업부의 피드백도 무난하다. 일을 겪다 보니, 왜 볼펜과 물티슈가 판촉물로 제일 많은지 알 것 같다. 최근엔 김영란법 여파로 의사에 대한 경제적 이익 제공이 불가능해지면서, 사무용품 이외의 판촉물은 결재도 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일하기 편해졌고, 한편으론 창의적인 기획은 더 힘들어졌다.





힘들어야, 욕먹는 걸 각오해야 창의적이게 된다



별거 아닌 판촉물 제작이지만, 10년의 마케팅 경력을 꿰뚫는 교훈이었다. 원래 새롭다는 건 기존과 다른 거고, 기존 것에 익숙한 사람들의 의심과 일시적인 불편을 초래한다. 그래서 일하는 게 힘들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도 먹는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새롭고 창의적인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 


'보톡스 박하사탕'은 꽤 괜찮은 판촉물 광고였다. 영업사원이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브랜드 홍보 자체에도 충실했다. 나중엔 영업부한테 또 없냐는 피드백도 많이 받았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제법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아이디어였다.


새로운 것은 기획자의 고난의 크기만큼 창의적이다. 내 몸이 힘든 만큼, 딱 그만큼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평가의 두려움은 잠시 미뤄두고 밝고 희망찬 결과만 그려야 한다. 그래야 평소와 다른 힘듬을 견뎌내고, 평소완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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