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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Jan 12. 2022

관악구 보톡스 & 필러 지도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프리젠테이션

* 본 글에 명시된 보톡스는 앨러간 브랜드가 아닌, 보툴리눔 톡신의 일반 명사 의미로 쓰였습니다.


왜 너한테서 보톡스를 사야 돼?



신입 보톡스 영업사원 시절 이야기다. 당시 나는 관악구의 성형외과, 피부과 병원을 상대로 보톡스를 팔았다. 25살 어린 여직원이, 의학 전문가인 의사를 상대로 '왜 우리 보톡스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병원장 눈에는 그저 어린 티 나는 평범한 영업사원이었다. 귀엽다는 듯 미소 지은 얼굴로 디테일링(Detailing, 의약품 설명 프리젠테이션)은 다 들어줬지만, 결국엔 본인이 쓰던 제품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완곡히 거절만 당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거절은 계속됐다.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한 신입사원이 날고 기는 경쟁사 선배들의 연륜을 당해낼 수 없었다. 관악구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병원을 가봤지만, 무작정 발품만 팔기엔 한계가 있었다. 5년, 10년의 경력 차이를 극복할 방법이 뭘까? 당장의 매출 달성보다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나만의 무기를 고민했다.



관악구 보톡스 & 필러 지도



지도(map) 프로그램에서 관악구 지하철역 지도를 다운로드한 후, 인근 성형외과와 피부과 병원 위치를 표시했다. 발품 팔면서 방문했던 내과, 산부인과, 치과 중에서도 보톡스 시술을 하던 병원은 전부 표시했다. 병원장 면담을 기다리면서 대기실에서 봤던 환자 수, 성별과 연령대는 따로 메모했다. 개별 병원에서 진행하는 보톡스 & 필러 시술 이벤트는 사진으로 찍어서 모아뒀다가, 종류별로 PPT 정리를 했다.


이렇게 관악구 보톡스 & 필러 지도를 만들었다. 기획부터 1차 안 완성까지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 환자 정보를 수집하느라 모든 병원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완성된 지도를 바라보니, 지하철 인근 보톡스 상권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업사원뿐 아니라, 의사이자 개별 병원 사업가인 병원장에게도 꼭 필요한 자료였다.


2012년 서울대입구역(관악구) 보톡스 & 필러 지도


2012년 보톡스 & 필러 병원 마케팅 제안서. 병원 시술 이벤트 사진을 모아서 정리했다.


개별 지하철역 지도와 마케팅 제안서를 출력해서 병원을 방문했다. 또 왔냐는 심드렁한 얼굴 앞에 준비한 자료를 꺼냈다. 홍보 브로셔겠거니 시큰둥한 표정에서, 인근 상권(이자 경쟁 병원 현황) 자료임을 알아보고 눈빛이 집중됐다.


- 이거 어디서 났어요?

- 제가 발품 좀 팔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원장님께 도움이 될까 고민하다가, 다른 병원에서 진행하는 보톡스 & 필러 마케팅 자료를 정리해봤습니다.

- 나도 다 아는 것들이긴 한데.. 이렇게 정리해서 보니까 참고는 되네요. 고마워요.

- 아닙니다, 원장님.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한 번 보시고, 혹시 우리 병원 이벤트를 새로 하신다면.. 제 보톡스 제품도 꼭 한 번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웃으며) 알겠어요. 다음에 재고 떨어질 때, 꼭 오세요


그렇게 지도에 표시된 병원을 전부 돌았고,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었다. 방문 후 일주일~한 달 이내에 재고가 떨어졌다고, 가격이 얼마냐는 문의 전화를 계속 받았다. 문의 고객 절반 정도가 내 보톡스를 구입했다.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프리젠테이션



지금은 보톡스 마케터로 일하면서, 훨씬 다양한 주제의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최근엔 'COVID-19 팬데믹에 따른 국내 보톡스 & 필러 시장의 트렌드 변화'를 제목으로 제품설명회를 하고 있다. 프리젠테이션 능력도 많이 늘었고, 유관 부서의 도움으로 작성된 PPT는 훨씬 전문적인 자료로 채워졌다. 이젠 아무 병원이나 발품을 팔면서 다니지도 않는다. 담당 영업사원이 제품설명회 약속을 잡으면, 나는 시간 맞춰 도착한 후 여유롭게 발표만 잘하면 된다. 신입 영업사원 시절,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던 선배들의 전문성과 여유로움을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전문성과 연륜을 갖고서도, 신입 영업사원 나우나우의 보톡스 & 필러 지도와 경쟁을 한다면 이길 자신은 없다. 고객에게 진심으로 도움이 되길 바라고, 내 보톡스를 꼭 팔고 싶다는 간절함. 고객의 마음을 움직일 그 결정적인 포인트를 넘어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고객은 정확하게 안다. 내 프리젠테이션이 오직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누구나를 위한 것인지. 아무리 많은 자료를 담아도,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만을 확실하게 집어낸다.




자료의 전문성을 알기 위해선 상대방도 그만큼 전문가여야 한다. 하지만 자료에 깃든 정성과 발표자의 간절함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필요조건이 없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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