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우나우씨, 잠깐 회의실에서 볼까? - 네, 부장님. - 내일이 마지막이지? 그동안 고생했어요. 같이 오래 일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참 안타깝게 됐네. - 아니에요, 부장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거.. 내가 너무 아쉬운 마음에 선물로 한 번 골라봤어요. - 아.. 감사합니다. - 비록 우리 회사에선 잘 안됐지만, 꼭 원하는 곳으로 취업되길 바라요.
인턴 퇴사하는 날, 부장님은 내게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선물했다.
- 그러니까, 부장이 너한테 책을 선물했는데, 제목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미친 거 아냐?? - 그냥.. 워낙 유명한 책이니까 사셨나 보죠, 뭐. - 아니, 그냥 가만히나 있던가! 가뜩이나 정규직 안돼서 힘든 애 놀리는 거야, 뭐야!
친한 과장님이 날 대신해서 욕해줬다. 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6개월 인턴으로 입사하면서, 업무 평가가 좋으면 정규직 기회를 노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확률이 낮다는 걸 알면서도, 취업이 간절했던 나는 반드시 이뤄질 미래라 믿으며 열심히 일했다. 사회초년생을 위한 자기 계발서를 탐독하고, 기꺼이 잡일과 야근을 자청했다. 일 처리도 빠르고 싹싹하다는 칭찬도 꽤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고, 결국 6개월 인턴 기간만 채우고 퇴사했다.
6개월 인턴십 짐을 풀면서, 부장에게 받은 책도 책장 아무 곳에나 던져놨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책장을 살피다가 우연히 문제의 책을 발견했다. 그때가 생각났다. 당시의 상황을 추억하는데,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있다. 취준생의 순진함을 연민하면서도, 책임자로서 느꼈던 약간의 미안함마저 털고 싶었을까? 20대 취준생 때의 기억과, 30대 사회 물 먹은 직장인이 느끼는 감정이 조금 다르다.
부장은 왜 내게 책을 선물했을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
책 내용 그대로, 정규직에 떨어진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회사와 사회 모두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위로하고 싶었을 수 있다. 혹은 모두가 힘든 세상이니, 너무 혼자만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력만큼 성과로 돌려받지 못한 인턴에게, 그 노력을 평가했던 책임자로서 선물하기엔 조금 무책임한 메시지라고 느꼈다. 20대엔 슬프고 무기력했고, 30대가 된 지금은 일종의 우월감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책 선물은 신중해야 한다. 받았을 때, 읽어볼 때, 시간이 흐르고 다시 찾아볼 때의 감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감정은 제각각의 메시지로 해석된다.
부장은 날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위로 메시지를 고르는 데 있어서, 조금 덜 신중했을 뿐이다. 퇴사하는 막내 직원에 대한 적당한 안타까움과 선배의 조언, 딱 그만큼의 배려로 책을 골랐다. 25살의 인턴도 딱 그만큼의 감동으로 선물을 받았다. '뭘 이런 걸 다'라는 말 한마디 정도의 감동이었고, 책장에 꽂으면서 금세 잊어버렸다. 우연이 되찾았을 때에도 '뭘 저런 걸 다' 정도로 시큰둥했다. 좋은 선물, 존경스러운 선배로 기억되진 못했다.
이젠 내게도 후배들이 생겼다. 걔 중엔 정말 아끼는 후배도 있다. 아직까지 책 선물은 못해봤다. 꼭 해주고 싶은 얘기, 후배의 마음을 보듬어주면서 그들의 취향에도 잘 맞는 책을 고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진심을 전달하는 것은 항상 힘들다.
힘듬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언젠간 후배에게 책을 선물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그들의 책장과 기억 속에, 따뜻했고 연락 한 번 해보고픈 선배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