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팀장님 메시지는 참 좋은데, 지금 장표는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이사회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요. 간결하게 핵심 문장으로 표현하면 어떨까요?
- 저도 팀장님 의견에 동의하고, 이사회에서 이 방향으로 결정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번 회의 주제와는 결이 좀 달라서, 한꺼번에 터트리면 논의 범위만 확장되고 결론이 안 날 것 같아요. 차라리 다음 회의 때 별도 아젠다로 다루면 어떨까요?
- 좋은 포인트인데, 너무 숫자로만 표현되니까 시선이 분산돼요. 핵심 지표만 표시해주세요. 차트를 써보면 어때요?
차분한 목소리, 음절 하나하나를 정확히 발음하는 말 속도, 상대의 의견을 꺾는 게 아니라 함께 품으면서 내 의견도 피력하는 배려와 관록.
오늘따라 우리 임원이 달라 보인다. 소위 임원의 품격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R&D 포트폴리오 중, 어느 것을 살리고 죽일지 결정하는 이사회 회의를 준비 중이다. 주제도 무겁고, 마케팅/전략/연구소 등 여러 부서가 연관된 복잡한 업무. 회의 시간이 한 시간을 넘어가자, 점점 집중력이 떨어진다. 회의실 내 산소가 바닥난 것 같다. 나도, 옆에 팀장과 차장도 자꾸 핸드폰과 노트북을 만지작 거린다. 그런데 임원들은 쌩쌩하다.표정은 지쳐보이나, 목소리 힘만큼은 회의 시작 때와 똑같다.
두 시간 만에 회의가 끝났다. 보통 회의 시간이 길어지면 결론도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말이 오간 만큼 '다음 회의까지 이것도 저것도 좀 더 검토해봅시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회의 결과는 명확했다. A와 C를 살리는 대신, 왜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보강하기로 했다. 다양한 부서에서 저마다의 의견이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모두의 의견이 적절한 비중으로 핵심 포인트에 담겼다. 이렇게 성과 있는 회의는 정말 오랜만이다.
임원은 효율적으로 회의를 주관했다. 아는 건 첨언하고, 모르는 건 질문하고 요약하면서 맥락을 파악했다.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질문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모여서 하나의 스토리로 정리됐다. 30페이지에 달하는 PPT가 통일된 큰 줄기를 이뤘고, 그만큼 설득력이 높아졌다. 저래서 임원이구나 - 눈앞의 성과에 탄복한다.
이 정도 능력이 있기에 임원이 된 걸까, 아니면 자리가 능력을 더욱 키우는 것일까? 저런 능력은 타고 나는 걸까, 아니면 배울 수 있는 걸까?
내겐 까마득히 먼 모습이다. 닮고 싶으면서 자신 없고, 해보고 싶으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새삼 다른 눈빛으로 임원을 바라본다.
[에필로그]
2주 후, 이사회가 끝났다. 목표했던 포트폴리오는 살아남았고, 이제 다음 개발 단계에 돌입한다. 눈앞에서 목격한 집단지성의 힘은, 그저 똑똑한 사람들의 의견 모음이 아니었다. 똑똑하기만 한 여러 의견을 하나의 메시지로 완성시키는 것이 핵심이며,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편집자가바로 임원이었다.
끝없이 확장하는 의견과 데이터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임원의 품격'이란 아마도 이런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