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기 전, 치실을 하다가 왼쪽 어금니 이빨이 깨졌다. 3년 전 레진을 때웠던 부분이다. 혹시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 사용했는데, 기어코 이 사달이 났다.
- 아, 결국 치과 가야겠네.
세상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빨 조각을 챙겼다. 혹시라도 깨진 단면이나 모양을 확인하면 치과 진료가 조금 빨리 끝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2. 어른한테도 무서운 치과 치료
다음 날 오후 반차를 쓰고 동네 치과에 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벌써 28년째 다니고 있는 나만의 치과 주치의 병원이다.
깨진 이빨 사진 옆으로 3년 전, 그것의 또 3년 전 사진이 나란히 나열됐다. 의사가 말하길, 레진으로 계속 때운 것 치고는 오래 버텼다며, 이젠 깨진 범위가 넓어져서 인레이나 크라운으로 씌워야 한단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이번에도 레진으로 때울 생각이었는데, 딱 그만큼의 치료만 견디기로 계획했는데, 의사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놨다.
- 저기.. 제가 겁이 많아서 그런데요, 둘 중에 어떤 게 더 빨리, 간단하게 끝날까요?
- 인레이가 더 간단하죠.
- 그럼 그걸로 해주세요.
- 네, 환자분 치아가 깨진 모양으로 금 모형을 만들어서 씌울 거예요. 아직은 남은 치아가 있으니까, 인레이로 잘 관리해서 버텨봅시다.
하지만 치료가 시작되고 윙-징-거리는 기계가 이빨을 분쇄하기 시작하자, 나한텐 결코 간단한 시술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옷을 부여잡은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얼굴까지 떨려오자 의사와 간호사 모두 '환자분, 너무 떨지 마세요', '이렇게 떠시면 몸살 나요'를 말하면서 나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무섭고 겁이 났기에, 얼굴과 몸을 계속 떨면서 결국엔 손을 들어 '잠깐만요'까지 외쳤다. 그렇게 한 시간 만에 치료가 끝났다. 나는 너무 창피한 마음에, 결제를 끝내자마자 부리나케 병원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내가 강한 어른인 줄 알았다. 한 회사의 과장으로서 사회적 안정을 쌓았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화목한 가정도 이루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신 조건을 모두 이루었기에, 나는 강하고 단단한 어른이 된 줄 알았다. 희로애락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다 큰 어른. 그러나 치과에서의 나는 어린아이였다. 간신히 눈물만 참았을 뿐, 덜덜 떨면서 '잠깐만요'를 외치는 겁쟁이였다.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많이 창피하고 부끄럽다.
3. 내 안엔 아직 어린아이가 있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겁났을까?
눈에 안 보이는 날카로운 게 입 안을 아프게 깎아내고 있었다. 나를 좋게 하려는 의도에 상관없이, 내 통제를 벗어나서 날 아프게 하는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어른이던 아이던 무언가 강제되는 상황은 똑같이 겁나고 힘들다.
나는 왜 이렇게 부끄러울까?
같은 상황과 감정이라도, 어른은 아이와 달리 초연해야 한다고 배웠다. '다 큰 애가 참을 줄 알아야지'라는 직접적인 지침부터 '어른은 자신의 욕구를 참고 다스림으로써 돈을 번다'는 무수한 컨텐츠 간접 교육까지. 티 내지 않고 불편함을 참을 줄 알아야 훌륭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치과에서의 나는 원초적 공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아이와 똑같았다. 그건 어른의 모습이 아니라는 자기 검열에 걸려서, 그것이 그토록 창피하고 부끄러웠나 보다.
하지만, 그게 꼭 창피한 일일까?
다음 치료까지 임시로 때운 어금니를 혀로 만지작 거리며, 치과를 겁내는 어른이 이토록 부끄러운 것인지 나 스스로를변호해 본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는 모든 것이 새롭고 미숙한 상태의 무언가다. 반면 '어른'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익숙해져서 웬만한 사건사고에 동요하지 않는, 약간은 무미건조하게 성숙한 무언가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 나는 치과 치료라는 반복된 공포에 초연해야 했다. 덜덜 떠는 호들갑은 어린아이의 몫이다.
무미건조한 성숙함은 좋은 것일까? '성숙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서 익숙해지는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롭지 않아서 감흥도 없는 상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의 미성숙함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평소와 다른 특별한 경험으로 쌓아갈 수 있다. 나는 어른이지만 치과 진료의 공포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그 감정에 솔직했다. 겁먹고 무서웠을 뿐, 의사 선생님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4. 어린아이가 오래도록 남아 있길
37살 어른이 되어도 내 안의 어린아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와 똑같이 희로애락 원초적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중학생 때와 똑같이 감성을 표출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인터넷에 올린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이만큼 더 많이 배우면서 감흥의 대상이 적어진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일상에 점차 무감각해지면서 몸도 마음도 평범해지는 것인가 보다.
태어난 지 17개월 차 내 아들 민준이를 바라본다. 희로애락 그 자체다. 하루의 모든 일과가 재밌고, 힘들고, 좋아 어쩔 줄 모른다.그런 민준이를 보고 있으면 어이없으면서도, 저런 순수함이 참 좋고 아름답게보인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치과를 무서워하는 어른인내가 조금 덜 창피해졌다.세상사에 점점 더 무뎌지는 와중에도, 나는 아직 어린아이의 솔직함을 간직하고 있다.치과라는 공포뿐 아니라, 별 것 아닌 일상의 기쁨과 슬픔도 즐길 줄 아는어린아이로 좀 더많이, 오래 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