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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Aug 05. 2023

빌라에 주차된 제네시스 EQ900


내가 사는 중랑구는 서울에서 가장 인지도 없는 지역 중 하나다. 경춘선이 닿는 상봉역 정도만 알려졌을 뿐, 낡은 빌라와 주택촌이 밀집한 오래된 동네다. 소설책에 자주 등장하는 뽀글머리 아주머니와 벌건 술톤의 아저씨들이 모여 사는 곳. 나는 이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친정과 신혼집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이곳은 나의 고향이다. 오래된 길 먼지와 짙은 사람 냄새가 내겐 아주 익숙하다.


오늘도 똑같은 코스로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코스 중간엔 30년 넘은 연립주택이 있는데, 꽃나무 담장 위로 터줏대감 고양이가 살고 있어서 구경인사 차 자주 지나다니곤 했다. 오늘도 고양이가 햇볕을 쬐고 있을까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풍경 속 이질적인 무언가가 눈이 띄었다.


'검은색 제네시스 EQ900'


짙은 검은색 차체는 7월 오후의 햇살을 받아서 눈부신 반사광을 뿜어냈다. 반짝임이 너무 세서 손으로 차양막을 만들고 실눈을 떠야 겨우 바라볼 수 있었다. 바닥에 그어진 주차선 따위는 너무 비좁다는 듯 측면 바퀴는 차선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회색 그라데이션 썬팅 처리된 창문은 제네시스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그들의 '우와'하는 표정을 거울처럼 보여줬다.


대기업 회장님 차. 굳이 내 입으로 부자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대한민국 부의 상징!


낡은 연립주택의 허름한 담벼락 옆에 주차된 번호판 세 자릿수의 검은색 제네시스 EQ900. 누추한 중랑구 면목동에 왕림하신 고귀한 왕족과도 같은 별난 장면이었다.


(제네시스 EQ900 사진 from 공식사이트)


나는 편협하고 질투 많은 사람이라서 동네 빌라에 주차된 독3사(벤츠, BMW, 아우디) 외제차를 볼 때마다 슬쩍 비웃으면서 지나갔었다. 부동산이야말로 그 사람의 가계소득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재산이며, 자동차는 부동산 다음으로 소득에 비례해서 맞춰야 하는 사치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빌라에 살면서 외제차라니, 분수에 안맞는 사치였다.


그런데 낡고 오래된 연립주택에 주차된 제네시스 EQ900에게는 평소의 비웃음을 짓지 못했다. 오히려 차주인의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저 정도의 부자가 왜 여기에 살까? 어떤 사연이 있을까?


연립주택을 지나서 다음 산책 코스를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제네시스 차주인을 상상했다. 성실하고 온화한 자수성가 사업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마도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이나 회장이겠지? 나이 든 노신사일까? 아냐,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고 연로한 부모님을 뵈러 온 효자일지도 몰라.


상상은 멋대로 가지를 뻗으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회갈색 체크무늬 재킷과 검은색 정장 바지를 콤비 스타일로 입은 노신사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사업체를 크게 운영하면서도, 오래된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는 다정한 사람일 것이다. 혹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중랑구를 떠났다가,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고 고향 부모님 집을 찾아온 젊은 사장님일지도 모른다. 젊음과 땀이 묻은 노력의 성과이기에, 제네시스는 가난한 동네의 낡은 연립주택 앞에서도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게 서있을 수 있다.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제네시스 차주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의아해졌다. 나는 줄곧, 동네 빌라에 주차된 외제차를 '겉멋'이라며 비웃지 않았던가? 미래를 위한 투자 우선순위도 모르고, 저축과 재테크의 의미도 모른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던가? 혼자만 깨어있는 척 자만했지만, 결국 나도 차종과 외관에 따라서 가치관이 흔들리는 비루한 사람이었다. 타인을 향한 질투조차도 멋대로 등급을 매겨서 다르게 반응하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부끄러웠다.


(면목동 중랑천 산책길 사진)


그 후로도 제네시스와 자주 마주쳤다. 오래된 연립주택의 낡은 담벼락 옆 항상 같은 자리에, 여전히 빛나는 검은색 차체를 뽐내며 서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눈빛으로 아는 체했다. 혹시 같은 동네 주민인가? 당신도 이곳이 고향인가?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 이웃이었는가?


얼굴도 모르는 제네시스 차주인과 무척 가까워졌다. 같은 면목동 동향끼리 동지애가 생겼나 보다. 가난한 우리 동네에서 자수성가로 일어난 영웅 같았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성장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네시스 차주인은 내 영웅이 되었다. 고향을 편안해하면서도 고 지겹다고 투덜대던 내게 성공한 동네 오빠처럼 느껴졌다. 사회적인 성취를 이뤄서 더 높고 화려한 곳으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낡고 오래된 연립주택을 버리지 않은 의리 있는 이웃이었다. 반짝이는 검은색 차광이 더 이상 위압적이지 않았다. 멋있고 친숙했다.


낡은 연립주택 앞에 세워진 제네시스 EQ900. 나도 같은 차를 타고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오고 싶다. 넓은 세상을 마음껏 누비다가도 익숙한 고향으로 돌아와서 맘 편히 쉴 줄 아는, 그런 여유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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