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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Aug 13. 2023

스물 한 살로 돌아갈래? 아뇨


뒤늦게 TV 프로그램 '비긴어게인 2'를 봤다. 포르투갈 호시우 광장의 바다를 배경으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스물 다섯, 스물 하나'를 부르고 있었다. 한때 즐겨 들었던 중성적인 목소리가 스무 살의 청춘을 노래하는데, 내 얼굴에도 TV 속 관객들과 똑같은 아련한 표정이 지어졌다. 살짝 눈물도 흘렸다. 37살 애엄마가 서 듣는 김윤아의 노래는 그립고 아련하고 슬펐다. 다양한 감정에 폭 빠졌다가, 노래가 끝나니 왠지 모를 후련함이 몰려왔다. 오랜만에 느낀 카타르시스였다.


내 스물 한 살은 2007년이었다. 당시 대학가의 키워드는 꿈과 노력 그리고 자기 계발이었다. 스무 살 자기 계발에 미쳐라, 거인의 꿈을 펼쳐라 등 방송과 서점가는 성실과 노력의 가치를 전파했다. 새마을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뤄낸 부모 세대의 가르침을 받아서 우리 세대도 꿈과 열정을 향해서 달렸다. 시급 3,480원조차 제대로 못 받더라도,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슬로건에 휩쓸려서 몸과 체력으로 세상을 배웠다.


그러다 금융위기가 터졌고 취업 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일명 전화기(전자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를 제외한 모든 전공의 취업이 어려웠다. 학벌, 학점, 토익 점수의 취업 3종 세트 중, 대학교 4학년 취준생이 노력할 수 있는 건 토익 하나였다. 강남역과 종각역은 토익 학원 수강생으로 붐볐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토익 공부, 아르바이트 그리고 자기소개서. 20대 초중반의 일상은 답답하고, 차갑고, 막연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우리가 뭘 잘못했냐'며 큰소리를 치고 난 뒤에는 끝없는 허무함과 패배감이 몰려왔다. 암울한 시기였다.


내가 제대로 된 청춘을 느낀 것은 첫 취업에 성공했던 26살이었다. 최종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의 희열이 지금도 생생하다. 몇 번 없었던,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흘린 적이 바로 그때였다. 초중고대학교를 잇는 16년 교육의 결실을 드디어 맺었다는 성취감,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 취업준비 2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매일 출퇴근할 수 있는 내 회사 & 내 자리의 안정감을 찾고서야 나는 20대 청춘의 눈빛을 다시 찾았다. 독서, 영화, 뮤지컬 공연 등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꽉 채워주는 문화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연애도 시작했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어른의 자존감으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쳤다. 비록 중소기업 신입사원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당시의 1년이, 10년 넘는 직장생활 동안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간이라 자부할 만큼.


열정 넘쳤던 1년, 신입 콩깍지가 벗겨지던 2년, 힘들고 서럽던 막내 생활 2년 등 총 10년의 시간이 쌓여서 나는 노련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만큼 일과 세상엔 점점 무심해졌다. 일도, 문화생활도, 사회정치적 이슈에도 나는 예전만큼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 회사로 출근했다가 퇴근하면 다시 집으로 육아출근하는 숨 가쁜 워킹맘의 일상을 달리는 중이다. 정신없이 힘들지만 집과 회사에서, 가족과 업무 성과에서 느끼는 성취감으로 행복하다. 내 삶을 경영하는 자기 효능감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스물 한 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당시의 젊음과 체력, 무모한 상상력과 가능성은 그립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와 맞바꿀 만큼 아깝지는 않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일지언정 나에겐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만들어온 현재가 귀하고 소중하다. 시간을 돌리더라도 지금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그래서 김윤아의 노래를 듣고 후련했나 보다.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시절이 그리운 만큼 현재의 내 삶이 소중하다는 보람을 느꼈나 보다.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하다.


40살, 50살이 넘어서 이 노래를 다시 들었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후련함을 느끼고 싶다. 스물 한 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내 이야기로 꽉 채워진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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