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이라는 선물

by 나나

누군가 나에게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두 가지를 말한다. 대학원에 간 일과 제주살이를 한 일. 두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곳에 없을 수도 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나를 살게 한 결정이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 일을 할 수 없어 대학원에 갔다. 나에게 대학원은 공부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도피처였다. 사실 일을 관두고 싶었다. 만류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새겨 들어 직장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대학원 파견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기 위해 떠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위한 일은 열심히 했다. 부지런히 상담을 받고 내가 좋아하는 산책, 운동, 공연보기를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이때 댕댕이도 입양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나의 상태는 썩 나쁘지 않았다.


복직을 하고 나니 다시 상태가 심해졌다. 그리고 그 해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생겼다. 다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병휴직을 통해 또 도망갔다. 그때 도망간 곳은 제주도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었고 정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선택한 장소다. 가야겠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배편을 예약했다. 언제 돌아올지 정하지 않았다. 내가 '다 됐다.'라는 생각이 들면 오기로 했다.


점심때쯤 일어나 간단히 먹고 댕댕이와 함께 오름에 올랐다. '1일 1 오름 도장 깨기'라는 나만의 목표를 만들어 매일 새로운 오름을 찾아다녔다. 오름을 다녀온 뒤 늦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 모를 밥을 사 먹고 근처 바다로 향했다. 매일 해지는 모습을 보고 깜깜한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바닷가에 원터치 텐트를 치고 누워있기도 하고 파도소리를 음악소리 삼아 책을 읽기도 했다. 댕댕이는 함께 오름을 오를 때면 앞서 가다가 뒤돌아서 나를 기다려주고는 했다. 그런 모습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발맞춰 걷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잘 맞는 정신과 의사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그런데 나의 별이 제주에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다녀온 뒤 오름에 오를 때나 바다를 바라볼 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과거를 훑으며 스스로를 알게 되었다. 하루 종일 혼자 걷고 자연 풍경 속에서 생각하다 보니 많은 생각이 정리되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자연풍경과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귀여운 댕댕이와 함께 했던 제주 생활은 앞으로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었다.


현실에서 도망쳤던 두 번의 경험이 너무 소중하다. 다 내려놓고 떠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비록 지금도 약을 먹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건강한 내가 있다. 도망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던 그 시간 덕분에 지금 나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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