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중딩이에게 사춘기가 왔다. 나의 갱년기는 아직인 거 같다. 내가 지는 게임이다. 보통 사춘기가 오면 집에만 있으려고 한다는데 내 첫째 중딩이는 이상하게 자꾸 어딜 가자고 한다. 그것도 제가 못 이겨 먹는 아빠가 아닌 만만한 나랑 같이 가자고 한다. 심히 불편하다.
기나긴 겨울방학, 나는 진짜 아드님 세 분 모시느라 진이 다 빠졌었다. 출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첫째 중딩이가 대전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모르는 척했다. 집요했다. 맛집에 가봐야겠단다. 더 모르는 척했다. 성심당에 가야겠단다. 질색팔색 더 외면했다. 입이 튀어나오고 졸졸 쫓아다니는 시위가 이어졌다. 나보다 큰 중딩이가 나를 쫓아다니며 징징대는 건 진짜 못 견딜 일이다. 졌다. 모든 일정을 너에게 맡기겠노라~ 기차표만 해결해 주었다.
서대전역에 도착과 동시에 난관에 부딪혔다. 서대전역에서 무려 한밭수목원까지 걸어서 간단다. “이 불효막심한 놈! 이 어미는 국토대장정 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택시를 탔다. 겨울이 지난 한밭수목원은 휑하니 산책하기 좋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있는 거목들은 이름표를 보며 그 풍성한 이파리와 꽃잎들을 상상하기에 딱이었다. 아직 쌀쌀한 공기에 산책하는 이들도 드물어 수줍은 모자가 정담을 나누기엔 더없이 아늑하고 좋았다.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보기 좋다는 덕담도 들었다. 수다스러운 중딩 아들이라 가능했다.
이팔청춘 내 아들은 모든 교통수단을 도보로 정하였고 나는 쌀쌀한 2월 마지막 날, 등에 땀나도록 걷고 또 걷다 겨우 찾은 맛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힘겹게 채운 에너지를 또 걸으며 소비하다 지쳐 또다시 택시를 잡아타고서야 드디어 명문대학 카이스트에 도착하였고, 그 대학의 상징물인 살아 움직이는 거위와 인증 샷을 날려준 뒤, 나는 뷰포인트 커피숍에 자리 잡고 눌러앉았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개강 전, 카이스트 대부분의 건물은 잠긴 상태였고, 관광객을 제외한 인적은 드물었다. 내 아들은 튼튼한 두 다리로 카이스트 건물 사이 사이를 누비고 다녔으며 나는 아늑한 카페에서 음료 두 잔을 아껴 마시며 하릴없는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어미의 노쇠함을 피력하여 겨우 일찍 귀가한 엄마는 “다음에는 꼭 친구와 가라”는 간절한 후기를 남기고 쓰러져 잠들었고 혈기 왕성 기운이 넘치는 중딩이 아들은 성심당에 다녀오지 못하였다며 못내 아쉬운 후기를 남기고 다음을 기약했다. 사진으로만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그래서 나의 아들이 명문대학 카이스트로의 진학의 뜻을 품었느냐, 아니다. 그냥 맛집이 궁금했는데 엄마를 꾈 빌미가 카이스트였을 뿐이었다. 가만 보면 전세가 역전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애가 어릴 때 내가 써먹던 수법이 보인다. 예상치 못한 아들의 반격에 엄마인 내가 이렇게 당하고 만다.
오래간만에 화창한 어린이날을 맞아 아직은 초딩인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는데 나의 첫째 중딩이는 여전히 군말 없이 따라 나온다. 이상하다. 그래 놓고 중간에 또 삐진다. 동생이 제 말을 안 듣는다고 삐진다. 쓰러져 있는 벌을 뭐라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초딩 동생과 그래도 난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놓아주라는 잔소리 대마왕 중딩이 사이에서 부모만 피곤하다. 당최 자기 말을 듣질 않는 초딩 동생에게 화가 난 첫째 중딩이는 가뜩이나 축제 기간이라 사람도 많은 보성 차밭에서 혼자 걷고 싶단다. 하아~ 다 큰 중딩이 잃어버릴까 봐 3:2 전략을 펼친다. 남편은 초딩 2명 담당. 중딩이 담당인 나만 속이 터진다. 몸무게가 나보다 훨씬 더 나가는 중딩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팔짱을 낀다. 꽉 막혔던 비염도 뻥 뚫릴 만큼 상쾌하고 멋진 삼나무 길을 질질 끌고 간다. 아주 피곤하다. 이 중딩이가 어릴 때는 이 길을 유모차 미느라 힘들었었는데 이젠 다 큰 중딩이 미느라 힘이 빠진다. 제가 왜 화가 났는지 한참을 떠드는 중딩이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척 적당한 취임새로 맞춰 준다. 중딩이의 목소리를 ASMR 삼고 드넓은 초록빛 차밭을 바라보며 눈뜨고 명상하는 스킬을 시전하다 보면 중딩이의 마음도 좀 풀린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여 주고, 꼬막 정식이나 떡갈비 정식을 배불리 먹여주면 지난했던 형제 갈등이 종료된다. 그날 중딩이의 찍힌 사진은 죄다 표정이! 아주 사랑스럽다. 그러면 나는 그 사진을 영구 박제하기 위해 반드시 사진이 들어가는 일기를 쓴다. 나의 노고를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흘려버릴 생각은 일도 없다. 기록만이 살 길이다.
현재 진행형인 내 첫째 중딩의 사춘기가 더디게 끝날까 봐 걱정이다. 둘째 초딩이의 사춘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만 첫째 중딩이가 하차해 주어야 둘째 초딩이 밀착 캐어가 가능하다. 서로의 윈윈을 위해 시간차 조율 부탁한다. 아들들의 사춘기 담당은 엄마이고, 엄마는 한 명이고, 조만간 엄마의 갱년기가 올 거라는 거. 서둘러라 아들들. 막둥이도 배려해 시간표 잘 짜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