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미워하기'의 생애사

아픈 몸, 뚱뚱한 몸, 못생긴 몸

by 레인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보면 건강했던 내 몸이 떠오른다. 지금처럼 만성통증이 없던 몸, 어지럼증이 찾아올까 불안해하지 않으며 거뜬히 일을 해치우던 내 몸이

그립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주인공 혜자는 25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노인으로 바뀌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외모가 갑자기 변해 20대로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도 억울하지만 가장 억울한 건 끊임없이 불가능을 경험하는 몸이다. 늙어버린 혜자의 몸은 더 이상 계단을 오를 수도 없고 빠르게 뛸 수도 없다. 어제는 아무렇지 않게 가능했던 일상들이 오늘의 몸에게는 불가능한 어느 기억이 되어버렸다. 몸이 아파 글쓰기를 멈추고, 책 읽기를 멈추고 노동도 멈추고 있던, 평범했던 일상을 멈추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 70대 노인 혜자는 누구보다 공감되는 존재였다. 아픈 몸, 불가능을 경험하는 몸으로 20대와 70대가 이어졌던 날이다.


아픈 몸

작년 여름, 오랫동안 안 좋았던 목 어깨가 드디어 파업을 일으킨 건지, 팔과 손가락까지 아파졌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목 어깨 근육이 굳어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신경을 눌렀던 것이다. 동시에 목과 어깨는 유래 없이 굳고 아파와서 평소 습관과 일상을 모두 멈춰야 했다. 대중교통에서 스마트폰 보기, 노트북 사용하기, 책 읽기 등. 조금만 목을 숙여도 어깨가 딱딱한 돌처럼 굳었다. 손가락과 팔이 아파서 설거지조차 할 수 없었고 기본적인 청소 등의 자기 돌봄 노동은 파트너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즈음 나는 내 일상과 삶이 질병에 잠식당한 것만 같다고 내 지인에게 표현했었다. 좋아하던 취미인 카페에서 책 읽기와 글쓰기, 일상의 습관이던 대중교통에서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던 행위 등을 모두 버려야 했다. 당연하고 평범했던 일상에서 내 몸이 차단된 것이다. 동시에 돌처럼 굳은 목 어깨를 위해 매일 요가해야 했다. 매일 하지 않으면, 그다음 날 내 몸은 더 딱딱하게 굳어 통증이 파고들었고 다가오지 않은 내일의 나를 위해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미워하다, 아픈 몸.

그래서 내 몸이 미웠다. 간단한 가사 노동도 할 수 없었기에 모든 사회적 활동과 노동, 일상생활을 중단해야 했던 시간들, 그 시간의 공백들 사이로 우울과 한숨이 찾아왔다.

왜 하필 내가?

그때 가장 부러웠던 건,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던 사람들이었다. 나에게도 저것이 무의식적인 일상이었는데 이제 나에게 불가능한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억울했다. 동시에 내 또래의 20대는 이렇게 아프지 않은데 왜 하필 나인지 억울하고 억울한 날들이었다.


내가 잘못 살아서 아픈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내가 아픈 걸 보면 무언가 원인이 있을 터였다. 나는 지금의 아픈 몸을 만들었을 더 어린 나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후회하고 저주했다. 그때 그렇게 오래 숙여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무리한 일정을 잡지 않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더라면...


그러던 어느 날, 끝없이 내 몸을 미워하다 이 감정이 익숙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내 몸을 미워하는 감정 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건강했던 시절, 그때도 나는 내 몸을 미워하고 있었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미워했다, 뚱뚱한 몸

내 몸에서 더 살을 빼내야 한다고 그러면 더 아름다워질 것이고 더 가치 있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여성으로서의 위치성을 처음 자각했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의 다이어트는 시작되었고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끝낸 건 아니고, 내 몸을 자학하는 행위를 더는 계속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내가 보기에 내 몸은 배가 너무 나왔고 다리 사이의 살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그에 반해 가슴은 너무 작은 몸이었다. 스키니진이 유행했던 그 시기, 나는 무조건 A라인 스커트만 입고 다녔다. 펑퍼짐한 라인 속에 나의 볼록한 배와 허벅지 사이의 살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당시 나의 시간은 곧 다이어트를 시작할 시기와, 다이어트를 하는 시기로 나뉘었다. 시간이 다이어트를 중심으로 분절되는 동안 음식과 나 자신 간의 도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 곧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이 음식을 먹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닥치는 대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비닐봉지 소리가 바스락 대도 먹을 것에 대한 소리일까 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먹고 후회하고 자기혐오를 이어갔고 또 그날 밤에 들어가 집에 음식이 있다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먹어댔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고 차라리 거식증에 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날도 있었다. 거식증에 걸리면 그래도 살은 빠질 테니까. 몸과 전쟁을 벌이는 나날이었다.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고 한 달이 지난날, 체중계에 서 보았다. 그러나 앞자리의 숫자는커녕 뒷자리의 숫자도 바뀌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바뀌지 않는 내 몸이,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밉고 미운 내 몸을 나 자신과 분리하여 마구 때리는 상상을 하며 펑펑 울고 말았다. 그 날 생각했다. 누군가 늘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다고 말이다. 지하철에서 서 있을 때도 걷고 있을 때도 누군가 내게 너무 뚱뚱하다고, 배 나온 것 좀 보라고, 허벅지 붙은 것 좀 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나였다.

끊임없이 스스로 미워하고 욕하는 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살을 빼야 한다며 스스로를 지독히 미워했던 시기의 나는 표준체중의 몸이었다. 너무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건강한 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절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았던 다이어트를 내 삶에서 놓기 시작하였다. 나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행위를 더는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오히려 체중이 더 줄었고 음식과 나의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왔다. 바꿔야 할 몸이라고 생각할 때는 끊임없이 내 몸을 보며 불평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평생 이 몸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몸을 두둔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볼록 나온 배는 남들도 다 그렇지. 허벅지 붙은 거야, 뭐 남들도 그런 걸. 다리가 말라서 갭이 있는 사람이 신기한 거야. 있는 그대로 괜찮아, 나"


이제야 나는 내 몸을, 그러니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미워했다, 못생긴 몸

쌍꺼풀이 없는 게 문제였다.

'뚱뚱한 몸'을 미워하기 전에는 '못생긴 몸'을 미워했었다. 쌍꺼풀이 없어 작은 눈이 밉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쌍액을 하고 다녔다. 중학생쯤에는 딱풀과 꼬리빗으로 쌍꺼풀을 만들고 다녔고 고등학생부터는 본격적으로 쌍꺼풀액을 하고 다녔다. 저녁쯤 되면 그 쌍꺼풀이 풀리곤 했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얼른 화장실에 가서 다시 붙였다. 그제야 눈이 조금 커졌다.

두껍고 돌출된 입도 싫었다. 어린 시절 내 별명은 '오리'였다. 그나마 그냥 오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온갖 별명들이 따라붙어 내 몸을 혐오하도록 부추겼다. 특히 나보다 두세 살이 많았던 초등 고학년 남성들은 어떻게 하면 나를 지독하게 놀리나 고민하는 사람들 같았다.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주둥이 절단식~!'이라고 말하며 뭔가를 자르는 흉내를 냈다. 그들의 장난이 지독할수록 나의 자기혐오는 끈덕지게 내 몸에 달라붙었다. 그럴수록 못생긴 몸을 숨기려 들었다. 사진 찍을 때는 두꺼운 입술을 더 작아 보이게 애써 오므렸고 절대 진한 색의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 가끔 바르면 조금만 발라서 큰 입술을 지우려 들었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눈에 가장 잘 보였기 때문이다. 셀카를 찍어도 거울을 봐도 쌍꺼풀 없이 작은 눈과 크고 두꺼운 입술부터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누굴 닮은 건지 왜 난 동생처럼 엄마의 쌍꺼풀을 닮지 못한 건지 유전자와 세포분열을 원망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내 얼굴이 있는 그대로 맘에 들기 시작했다. 입술이 두꺼워서 창피하다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도톰한 입술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또는 자주 새 빨간색 립스틱을 발라보며 내 입술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곤 한다. 콤플렉스였던 작은 눈은 결국 쌍꺼풀 수술을 하고 말았다. 1년도 안되어 쌍꺼풀은 풀어졌지만 그래도 무언가 내 눈이 마음에 든다. 남들처럼 크고 또렷한 눈은 아니지만, 작고 날카로워 보이며 담담한 듯한 내 눈매가 나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파도, 뚱뚱해도, 못생겨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조한진희 작가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이 있다. 페미니스트가 질병을 겪어으며 기존의 사회로부터 겪은 소외를 사회구성적 언어로 풀어낸 책이다.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건강한 노동력'을 지닐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충분히 아플 권리에 대해 논의하는 책이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는 질병이어도, 골골되는 몸이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큰 위안을 얻었음은 물론이고 아픈 내 몸이 겪었던 소외감에 대한 언어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북 토크를 갔을 때 조한진희 작가님께 직접 받은 엽서가 있다. 책에 있는 구절이 담긴 엽서였다.

가장 위험한 것은 아픈 몸에 대한 자책감이다. 우리는 아플 만해서 아프다. 우리에게는 아플 권리가 필요하다.
이 몸을 미워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할 수 있기를.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건강한 몸에 압도되지 않고, 정상에 집착하지 않기를... 그래서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조한진희)와 작가님께 받은 엽서

이 문장은 아픈 몸, 뚱뚱한 몸, 못생긴 몸에 대한 자기혐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해서 아픈 게 아니라, 뚱뚱한 게 아니라, 못생긴 게 아니다. 아파도 뚱뚱해도 못생겨도 그런 나 자신을 수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건강한 몸, 마르고 예쁜 몸이 표준인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몸'들'인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잘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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