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다리 고대하던 수학여행을 왔다! 이제 친한 친구들 무리와 어울려 구경을 하려 하는데,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다가오신다. "같이 다니자 얘들아!"
어느 날 직장 부장님이 다가와 말씀하신다. "퇴근하고 나서 같이 저녁도 먹고 주말엔 같이 등산도 다니면서 가까워지면 좋겠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직장 상사니까 예의는 지켜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하는 대화에도 잘 참여해줬으면 좋겠고 말이야.(=내가 윗사람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네가 묻지도 않은 조언을 해도 자네는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집중하게)"
나에게 다가와주는 호의는 고맙지만, 불편하다. 공유하는 취향도 가치관도 없는 존재가, 게다가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의 사람이 다가오는 상황. 그래서 쓸데없는 죄책감이 드는 난감한 상황. 시부모가 친해지자며 다가오는 상황이 바로 이러하다.
어느 주말, 파트너의 아버지께서 하룻밤 놀러 와 묵고 싶다 하셨다.
나는 파트너와 3년째 동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가족문제는 각자 알아서 하자'라는 마인드를 오래전에 합의한 사이다. 서로의 부모 또는 가족이 파트너를 힘들게 할 경우, 전적으로 해결의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남성인 파트너의 역할이 가장 클 것이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지만, 며느리의 어원은 '시댁에게 밥을 갖다바치는 사람'이듯이, 가부장제에서 며느리와 시댁이 맺는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결혼을 한다면 명절에 각자 자신의 집으로 향하거나 아예 가지 않는 방식 등으로 가부장적 관습을 거부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물론 이 모든 걸 말씀드리고 시부모를 설득하는 과정 또한 파트너가 맡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파트너의 아버지께서 하룻밤 놀러 와 묵고 싶다고 하셨다. 파트너는 먼저 나의 의견부터 물었다. 그러나 '시댁 문제는 남성 문제'라며 기고만장한 글을 썼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거절하기가 죄송하여 승낙하고 말았다. (파트너의 부모님은 자주 만나자고 연락해오곤 하신다. 하...) 그렇게 나는 성별도, 세대도, 취향도, 관심사도 다른 낯선 중년 남성, 게다가 '시'자로 얽혀있는 상하관계의 남성과 세 끼 식사를 함께 하고야 말았다.
시부모와의 관계가 '관계'가 아닌 이유
우리가 맺는 관계의 유형은 대부분 둘 중 하나다.
취향과 가치관이 맞거나 : 취향이 맞는 친구들
삶의 한순간을 공유했거나 : 학창 시절 친구, 가족, 직장 동료 등.
그러나 시부모와의 관계는 둘 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 소재는 없다. 정말이지 쥐어짜고 쥐어짜내도 없다. 취향과 가치관은 맞지도 않거니와 공유하는 삶의 경험도 없고 있어도 궁금하지 않은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이어졌다. 아버님은 먼저 나부터 시작해 내 가족 구성원의 안부를 차례차례 물으셨고 아버님이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얘기하기 시작하셨다.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의 중요성 등등...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 끼의 식사가 꽉 찬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 끼의 식사를 함께했다는 것이다. 가끔 가다 내가 한 말은 이 셋 중 하나였다.
그렇군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다. 이러한 상하관계에서의 대화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발화 권력이 독점된 것이다. 그 대화에서 글쓰기와 책을 좋아하고 나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는 취미를 가진 '나'라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나 자신'을 삭제한 채 며느리 역할이라는 감정노동을 단순 반복했던 것이다.
시부모와 있으면 불편한 이유
나는 아버님과 있으면 뭘 해도 불편했고 안 해도 불편했다. 식사를 하고(다행히 외식했다) 우리 집에 오시자 과일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일 아침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지 고민이 들었다. 동시에 이렇게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불편했다. 며느리 역할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였지만 이 관계에 놓여있는 한, 나는 초조한 며느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유니콘 파트너는 그런 나를 알아채고 조신하게 과일을 깎아 내왔고 아침식사까지 책임졌다.(사실 미리 파트너가 하기로 합의했었다) 아버님과 함께 한 삼시 세 끼 동안 내가 한 돌봄 노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자가 들어가는 가부장제 관계에서 과일 깎기, 아침 준비 등의 돌봄 노동은 내 몫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관계다.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주어진 역할을 당연히 해내도록 여겨지는 관계. 아랫사람이 그 역할을 거부할 경우 불안하고 불편한 관계. 미셸 푸코는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권력이란 무엇인가> 참고) 그에 의하면 '권력'이란 시아버지가 권력을 쥔 채, 내게 아침밥상을 차려오라고 명령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딸 같은 며느리'라고 부르며 하하호호 웃는 가운데, 며느리가 자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며느리의 역할이라 여겨지는 돌봄 노동을 하는 상황을 두고 권력이 작동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나는 미셸 푸코의 권력관계 이론을 '며느라기' 역할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나 자신은 없다.
아버님과의 세끼의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나는 절대, 죽어도 네버 며느리가 될 수 없겠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건 내가 버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몸이 거부하는 실존적 사실이었다. 나는 시부모와 며느리라는 상하관계 안에 들어가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상하관계 안에서 '내 언어로서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인 나 자신을 지우고 정해진 대답('네~^^)을 기계처럼 할 자신도 없었다.
시부모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은 없다. 며느리만 있을 뿐이다.
파트너의 부모님들은 좋은 분들이시다. 나를 배려하시고 내가 불편할 수 있는 말을 조심하며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오랫동안 내가 죄책감을 느낀 이유였다. '좋은 분들'이 '친해지고 싶다고 다가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분들'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내 몸이 실존적 거부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에 진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시부모가 좋고 나쁨의 문제도, 나라는 사람이 이기적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라지는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 고민이자 노력일 뿐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시부모와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