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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Feb 20. 2020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일본군 '위안부', 희곡 1945

희곡집 1945, 배삼식 작

*한줄평 : 민족/국가와 젠더를 횡단하며 탄생한, 입체적 여성 인물의 탄생


우리가 더럽다구? 아니. 우린 더럽지 않아. 누가 누굴 보고 더럽다는 거야! (중략) 더러운 건 우릴 보는 당신, 그 눈이지. 씻으려면 그걸 씻어야지. 하지만 아무리 씻어두 아마 안 될 거야.


최근까지 일본군 '위안부' 컨텐츠에서 묘사된 '위안부' 여성은 대부분 소녀 아니면 할머니였다. 소녀 시절에 겪은 전쟁 성폭력 피해를 주제로 하거나 노인이 되어서야 증언에 나선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한 사람의 생애사는 여러 시기를 거치며 통과했을진대, 소녀시절에 전쟁 성폭력을 겪은 이후이자 노인이 되어 세상에 증언하기 전에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내야 했을까? 희곡 1945는 바로 그 시기(소녀 이후의 삶이자 노인이 되기 전의 시간)를 다룬다. 


연극 <1945>. 희곡 <1945>를 바탕으로 2017년에 공연되었다.
 1945년 해방 직후, 만주에 살던 조선 사람들은 전제민 구제소에 머물며 한반도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린다. 한편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은 함께 위안소에서 지냈던 일본인 '일본군' 위안부 미즈코를 벙어리 동생이라고 숨기며 보호하지만 결국 들통날 위기에 처한다. 


희곡 1945의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악쓰고 설치는 여성 캐릭터, 피해자다움을 깨다.

2. 민족/국가를 경유하며 만들어낸 여성 서사

3. 한국 가부장제의 민낯 : '위안부', 혐오하거나 동정하거나

4. 미군 위안부와 연결되는 한국 여성 현대사


첫 번째, 희곡 <1945>는 악쓰고 설치는 여성 인물(명숙)을 내세움으로써 피해자 다움을 해체한다. 그동안 '위안부' 서사에 있어 대부분 여성 캐릭터는 무해하고 착하고 연약한 여성으로 묘사되곤 했다. '위안부' 여성이 겪은 전쟁 성폭력의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러는 동안 '피해자다움'이 고착되었다. 피해자는 무해하고 연약하며 선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피해자는 모두 무해하고 연약하며 선하기만 할까? 특히 '위안부' 피해를 겪고 홀로 살아남아 어떻게든 전후 한국 사회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을 여성이라면 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희곡 <1945>의 주인공 명숙은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여성의 존재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명숙은 일본인 아기들을 팔아 노잣돈을 마련할 정도로 억척스러운 사람이며 동시에 '위안부' 피해자인 자신들을 비난하는 조선인들에게 바락바락 대든다. 일본인 미즈코를 여동생이라고 속일 정도로 영리하다. 이렇듯 희곡 <1945>는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를 내세움으로써 피해자다움을 해체한다.


두 번째, 민족/국가를 경유하고 횡단하며 만들어낸 여성 서사다.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겪은 민족문제로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희곡 <1945>에서 명숙이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은, 명숙을 동정하는 조선인 남성 영호가 아니라, 위안소에서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일본인 '위안부' 미즈코다. 일본 제국주의가 '위안부' 제도를 만들어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끌려가긴 했지만, 이 곳에는 일본인 여성도, 필리핀 여성도 존재했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남성 군인으로 하여금 여성의 성(姓), 즉 여성의 존재성을 착취하는 것을 제도화한 전쟁 성폭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이 아니라도, 일본인이어도 여성이라면 전쟁 성폭력의 잠재적 대상이었고 실제 잠재적 대상이었다.(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 희곡 <1945>는 일본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미즈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벗어난 젠더 문제임을 보여주고 동시에 명숙과 미즈코의 우정을 통해 민족, 국가, 젠더가 횡단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여성 간의 연대를 보여준다. 


세 번째, 희곡 <1945>는 비난하고 침묵하고 방관했던 한국 가부장제의 민낯을 샅샅이 드러낸다. '위안부' 여성이 소녀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건 한국의 가부장제가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타자화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을 부끄러워했고 그녀들이 피해를 발설할 경우엔 비난했으며 결국은 50여 년간 침묵을 종용했다. 90년대에 들어 할머니가 된 '위안부' 피해자가 발화할 수 있었던 건,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소수의 듣는 존재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희곡 <1945>에 나오는 조선인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에 술렁이고 쑥덕인다. 최악은, 비록 그녀들이 더럽혀졌지만 '우리'가 그녀들을 깨끗하게 해 주자는 계몽과 연민의 태도다. 그러자 명숙은 소리치며 말한다.

우리가 더럽다구? 아니. 우린 더럽지 않아. 누가 누굴 보고 더럽다는 거야! (중략) 더러운 건 우릴 보는 당신, 그 눈이지. 씻으려면 그걸 씻어야지. 하지만 아무리 씻어두 아마 안 될 거야.


네 번째, 미군 위안부와 연결되는 한국 현대사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 제국주의가 포주가 되어 여성의 성을 매매(라는 이름으로 착취)한 제도였다. 전후 한국사회에 만들어진 미군 위안부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포주가 되어 한국 여성의 성을 미군에게 매매·착취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한미 동맹 관계를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 아래, 미군 '위안부' 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침묵해야 했다. 그랬기에 그녀들은 '양갈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존재했지만, '피해자/생존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희곡 <1945>는 존재하되 존재할 수 없었던 그녀들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희곡의 결말에 이르러 명숙은 조선 땅에 돌아오지만, 미군 지프차에 타 있는 모습을 보이며 미군 '위안부'로 유입된 암시를 보인다. 일본 제국주의가 포주가 되어 조선 여성의 성을 매매·착취한 시대가 끝나자, 이제 한국이란 정부가 적극적으로 포주가 되어 자국 여성의 성을 매매·착취한 시대의 서늘한 풍경이었다.






 우리 사회가 '위안부' 여성의 삶을 소녀(전쟁성폭력 피해자)와 할머니(증언자)로만 기억하는 현상 이면엔, 한국 사회의 가해자성을 망각하려는 노력이 있다. 피해와 증언 사이 그녀들의 오랜 침묵을 종용한 것은 바로 한국 가부장제였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이 겪은 전쟁 성폭력을 순결의 훼손으로 보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 속에서 소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중화되었음에도 한국 사회는 '소녀'와 '할머니'의 이미지를 통해 악마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자성만을 기억하고자 한다. 희곡 <1945>는 이러한 무의식적 망각 속에서도 날카롭게 잊힌 시절을 직시한다. 소녀도 할머니도 아닌 여성의 존재, 악쓰고 화내는 피해자의 존재, 조선인 남성보다 일본인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조선인 여성의 존재, 그리고 끝내 미군 '위안부'로 유입되는 여성의 존재 등.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면,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부정당한다. 그리고 존재를 부정당하고 기억되지 않은 이들은 필연적으로 소수자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날카롭게 직시하고 더욱 기억해야 한다. 희곡 <1945>는 그 날을 선명히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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