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점수를 조작했어요 ㅠㅠ

#운동회 #배턴 이어달리기 #점수판

by lotus

역시나 첫 학교 그것도 첫 해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 당시 학교의 행사 중 가장 큰 것은 봄에는 소풍, 가을엔 운동회였다. 방학을 끝내고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각 학년에선 학년별로 이번 대운동회 때 무엇을 할지. 연습을 짜느라 무척이나 바빠졌다. 사실 대강의 계획은 이미 방학 전부터 짜 있었고 2학기가 시작되면 실제로 무용 연습에, 달리기 줄 세우기, 전체 학년 경기 연습을 하느라 아직 가시지 않은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나날이 이어지는 것이다.

당시 나는 전담 교사여서 일이 적은 편이었다. 그저 내가 속한 학년의 선생님들을 돕고 학년 전체가 운동장으로 나가는 시간엔 같이 나가서 아이들 줄 세우기 등을 같이 하는 정도였는데 이런 내게 학교 체육부장님으로부터 새롭게 부여받은 엄청난 역할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점수판 담당'!

대운동회 때는 청군과 백군으로 전교생이 나뉘어 전체 경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운동장 구석에 입간판처럼 점수판을 만들어서 그때그때마다 바뀌는 점수를 게시하는 일이었다. 작년에 잘 만들어 둔 점수판이 있어서 나의 짝꿍 동료 교사와 나는 둘이 앉아서 <OO국민학교 대운동회 계획>을 보며 점수를 게시하게 된 거다. 예를 들어 1학년 전체 경기에서 이긴 편에는 100점, 진 편에는 50점 이런 식이었다. 1000여 명이 달리고 구르는 넓디넓은 운동장은 먼지가 어마어마해서 유난히 속눈썹이 길었던 내 친구의 속눈썹은 먼지로 인해 하얗게 변해버릴 정도로 후끈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드디어 1부 행사가 끝나고 점심 시간을 약 1시간 가진 후 2부가 시작되었다. 아마 1부까지는 청군이 약 150점 정도 앞서가고 있었던 듯 하다. 2부의 꽃 맨 마지막 경기는 4학년~6학년이 같이 하는 계주(이어달리기)였다. 가장 마지막에 하는 데다 점수 배정이 가장 크니 모두의 관심은 여기에 쏠릴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1부까지는 지고 있던 백팀이 만약 계주에서 이긴다면 200점을 얻어서 진 팀에게 100점이 주어진다 해도 역전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였다. 게다가 6학년 아이들이 뛰는 모습은 4,5학년 아이들이 종종종종 뛰는 것과 사뭇 다른 박진감에 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보는 맛이 있었다!

드디어 계주가 시작되었다. 4학년 여학생부터 뛰기 시작한다. 선생님들의 인솔대로 운동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이들이 조금씩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응원을 시작한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5-6학년 여학생들로 구성된 치어리딩 팀이 각 학급 앞에 서더니 응원에 더욱 열띤 분위기를 선사한다. 나 또한 누가 더 잘 달리는지, 눈 깜짝할 새 치고 달리면서 역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같이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4학년의 한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달려 오셨다.

'?(무슨 일이지?)'

"아이고, 그 점수판 그러면 안되지!" 이러시던 그 선생님은 청군(750)과 백군(600)의 점수판 중 백군의 십자리 수 0을 떼시더니 4를 그 자리에 바꾸어 놓으신다.

"선생님, 백군이 600점 맞는데요...?"

"김선생님, 지금 보면 150이나 차이가 나서 너무 재미가 없잖아요. 640으로 만들면 혹시 청군이 이겨도 결과는 똑같은데 대신 아슬아슬하게 되잖아요? 백군이 이겨도 오히려 더 아슬아슬해지면서 아이들이 더 흥분하죠! 그럼 아이들이 더 열심히 뛰고 응원하거든요!!"

이러시더니 또 부리나케 본인 학급 쪽으로 뛰어가신다. 아! 아~~ 그런 건가요?

지금껏 계획서에 적힌 대로 '각 경기 당 이긴 팀은 200점, 진 팀은 100점을 배점한다'라는 원칙대로 점수를 게시하던 우리는 그 깊은 뜻을 그제야 이해한다. 이미 용광로에 빠진 듯한 들끓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가끔씩 우리가 게시하는 점수판을 슬쩍슬쩍 보면서 이번 경기의 결과가 우리 팀의 승부에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 팀이 이긴다 해도 어차피 최종 승리를 못한다고 하면 지금 뛰는 아이들이나 그 아이들을 응원하는 아이들이나 김이 빠질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약간의 점수 조작(?)을 통해 분위기를 더 업 시킨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교과서적으로 계획서 상의 점수 배점에만 고착되었던 우리는 이 놀이판의 분위기를 조금 더 상승시킬만한 기술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글쎄, 그게 너무 오래 되어서요. 다만 그때 릴레이에서 이긴 팀이 최종 승리를 가져갔던 것 같다. 근데 아니라고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일까?

일단 모두들 즐거워했다. 먼지색 마스카라를 칠한 듯 먼지를 온통 뒤집어 썼을지언정, 이긴 아이들은 운동화 밑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껑충껑충 뛰어오르면서 기쁨을 표현했고, 결국 졌던 팀의 몇몇 여학생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또 그 주변의 아이들이 얼싸안아 위로를 했지만 다 그것도 좋은 추억이 되었을 터다,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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