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알바 #산업통계조사
1992년도 일이다. 나는 동사무소(지금의 행정복지센터) 대학생 공공알바를 지원했는데 운좋게 뽑혀서-워낙 많은 학생들이 신청하지만 그냥 랜덤으로 뽑아서 각각의 동사무소에 배치한다-안산시 반월공단 내 한 동사무소-지금 찾아보니 어디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공단 근처에 행정복지센터가 없다-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여름방학 기간인 약 2달동안 그 곳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간 둘째날부터 나는 '산업 총조사'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 일은 5년 주기로 각 산업체를 직접 방문하여 사업체 수, 종사자 수, 산업 구조 등을 파악하기 위한 설문 조사를 하는 것으로 국가 경제정책 및 지역개발 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 제공이 목적이라고 한다.
어쨌든 한여름 더위를 틈타 아침에 동사무소에 출근하여 도장을 찍고 오전과 오후 두번이나 가끔씩 한번씩만 나가서 각 사업체를 방문해야 했다. 보통 산업체를 방문해서 내가 해야 할 질문이나 행동 지침은 이런 거였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번 92년도 산업총조사를 하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삿말을 한 후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가지고 있는 설문지에 기록했다. 그 질문들은 대략 이런 내용에 대한 거였다.
- 사업체의 설립일은 언제인지, 산업체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 고용인의 수는 몇 명이나 되는지
- 자본금은 어느 정도인지, 본사/지사 여부와 공장 분리 여부
- 매출 및 경영 실태 등
이런 질문을 20대 초반 학생이 한다는 게 대답해 주는 입장에서-물론 조사에 응하는 게 의무이긴 하지만-얼마나 성심성의껏 해 줄까 싶은 의구심이 계속 들었고 무엇보다 한여름 내가 방문했을 때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분주했다. 그래서 일정 기간이 지나자 처음처럼 꼼꼼히 묻기보다는 약간 꼼수를 부리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면 질문 끝에 "그냥 대충 알려 주셔도 됩니다." 내지는 "바쁘시니까 적당히 적어 주세요." 이런 식이었다.
그 날도 역시 30도가 넘는 뜨거운 날 점심 무렵이었고 가끔 출장지가 가까우면 우리를 근처까지 태워다 주시는 주사님-지금의 주무관님-도 안 계셔서 버스를 탄 후 공단에 내렸다. 오늘 갈 곳은 약 10여 곳. 얼른 얼른 끝내야 겠다는 생각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내 말끝엔 "그냥... 적당히..."가 따라 붙었다. 거의 다 끝났다고 생각되어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어느 공장에 들어갔다. 경비실에 들러 간단히 허가를 받은 후 사무실로 올라갔다. 젊은 경리직원과 3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분이 있었는데 남자분은 작업복과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처음엔 경리직원분한테 물으니 그 질문을 들은 남자 분이
"여기 일단 소파에 앉으세요. 제가 대답하겠습니다."라고 소파를 가리킨 후 자리에 앉으셨다.
"네, 감사합니다. 이 질문들을 제가 드리고 적을게요. 바쁘시니까 대강 알려 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남자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이거 5년마다 한번씩 나라에서 하는 총조사 아닙니까? 이거 이렇게 대충 하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순간 설문지만 쳐다 보며 말하던 나는 놀라서 그 남자분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답변하는 분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나의 이런 질문에 "네..네.. 그건 00이라고 적어 주세요." 내지는 "한 0명 될 거에요. 그렇지?" 하면서 주변의 누군가에게 묻던 사람들만 만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붉어진 내 얼굴과 달리 내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비록 내가 어린 알바생이었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타이르듯이 그렇지만 정중하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분 말씀이 너무나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맞다. 이거 5년마다 하는 총조사잖아. 대충 해 달라고 내가 먼저 말하다니... 그럼 그동안 얼마나 대충 대답을 했을까...
뭔가 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때 당시 어버버 하면서 부끄러움에 말을 잘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 분이 내 설문지를 가져다가 꼼꼼하게 잘 살핀 후 작성해서 다시 건네주면서 말했다.
"작성 다 했습니다. 수고하세요." "가..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진짜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뭔가 잘못되었을 때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올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날 그런 어른을 만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