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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얀 Jan 02. 2024

누구를(무엇을) 위해 승진을 했나

시험 합격이 이렇게 괴로울 일인가. 내 인생에서 제일 기쁘지 않은 합격 소식이 들려온 후, 다시 해외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좀 낯설었다.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다시 해외 본부로 돌아간 날, 본부 여러 처실을 돌며 인사를 드리고, 본부장님께도 찾아갔다. 예의 그 면접관님이 이제는 본부장님이 되어 계셨다(사실 내가 시험을 통과했을 때, 발표 나자마자 가장 먼저 축하 문자를 보내 주신 분이셨다.). 내가 임신한 걸 아시고는 장난스레 "왜 왔어?" 하셨는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라고 할 뻔했다. 정말이지 내 말이 그 말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여길 온 걸까?

물론 낯익은 분들을 다시 뵙는 건 좋았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상사들은 대부분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해 계셨다. "나얀이, 그동안 어디 갔다 왔어?" 라며 나를 맞아 주시는 분도 계셨다. 그때 신입이었는데 벌써 승진하고 왔냐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는 분도 계셨다(내가 알기론 그분도 승진을 아주 빨리 하셨는데..).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곧 출산휴가에 이어 육아휴직에 들어갈 나에게는 사업 부서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출휴 전까지 몇 달 동안, 나는 운영 부서에서 잡일과 대관(주로 국회 담당) 업무를 담당했다. 임신부는 4시에 퇴근할 수 있었지만 8-9시까지 야근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기가 내 뱃속에 있고 사택으로 돌아가봐야 아무도 없으니, 오래 근무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해외 본부에 있는데도 외국어를 쓸 일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정말 괴롭게 했다.

당연히 이런 생각이 뒤따랐다. '이러려고 승진했나? 이 업무 하려고 내가 가족을 등지고 여기까지 와 있는 건가? 이런 일이라면 지사에서도 충분히 많이 할 수 있는데, 난 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물론 운영 부서의 업무를 폄하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운영팀 업무는 특히 회계 분야의 배경지식이나 경험이 필요했다.(회계 관련 업무 하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외국어를 쓰는 거였다. 꼭 통번역이 아니더라도, 외국어를 쓸 때 나는 '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곧 휴직에 들어갈 사람에게 연속성이 필요한 사업 부서의 일을 맡길 순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사업 부서 근무 경험이 있고, 본부 전체에 얼마 없는 아랍어가 가능한 인력이라 하더라도. 그걸 알고 있는데도, 휴직 전 짧은 시간의 경험은 나를 두고두고 괴롭게 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그때 만난 분들은 짐덩어리(!)처럼 느껴질 수 있는 나를 따뜻하게 품어 주신 분들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심어진 '해외 본부가 더 이상 옛날의 그곳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의 씨앗은 끔찍했다. 내가 그토록 속하고 싶어 했던 곳,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해외 본부는 이제 없는 걸까. 단순히 내가 운영 부서에 근무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거기서 보고 듣는 사업 부서의 분위기도 옛날과는 사뭇 달랐다. 세계 경제가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괴로웠다. 해외 본부는 좋은 곳, 내 기억 속의 완벽한(?!) 그곳이어야만 했다. 나는 주말 엄마가 될 각오를 하고, 남편과 태어날 아이를 뒤로 하고 여기로 이동한 거니까. 해외 본부는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어야만 했다. 근데 과연 그럴까?!

출산을 두 달쯤 앞두고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배가 불러올수록, 매 주말마다 본사-남편이 있는 도시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버거웠다. 출산 전 어떤 응급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사택에 혼자 살고 있는 것도 좀 찜찜했다. 첫 아이라 모든 게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조심한 게 그 정도였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두 달은, 5분 대기조처럼 조마조마 하긴 했지만, 나름 자유인으로 누리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오로지 나(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의 대부분을 책을 읽거나 깔짝깔짝 글을 쓰며 보냈는데, 그때 썼던 글은 보통 이런 내용이다.

'하루만이라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되고 싶다. 그럼 시간을 돌려서 아예 승진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을 거다. 아니면 일부러 답지에 다 틀린 답을 쓰고 나왔을 거다. 아니, 애초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날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난 왜 이렇게 모성애라곤 없는 이기적인 엄마일까? 왜 그렇게 내 생각만 한 걸까? 외국어 쓰는 일이야 취미로 해도 되지 않나. 가족과 떨어져 살 결심을 할 만큼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저런 류의 자책과 후회는, 첫째를 처음으로 품에 안아 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조리원에서 보낸 2주 내내 젖몸살의 아픔과, 그보다 더한 회한으로 발버둥 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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