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반찬 받아먹기 동거 생활
자기 전에 동거인이랑 떠들고 있는데 동거인이 '헐 속보 떴는데?"라며 포털 화면을 보여줬다. 북한이 국경선 부근 포병부대에서 완전사격 준비 태세를 지시했다는 뉴스였다. 갑자기 올라오는 속보들에 과몰입 오타쿠가 되어 우리는 금세 '진짜 전쟁 나면 어떡하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으려나?'라는 대화를 나눴다.
일단은 고구마와 감자가 1박스씩 있고, 냉동고에는 수제 미숫가루와 찐 옥수수, 알밤이 든든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전쟁통에도 한 달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양이다. 이 구황작물들은 서울 사는 딸내미가 못 먹고 다닐까 봐(엄마.. 저 너무 먹어서 늘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살아요), 입맛 없을 때 끼니 거를까 봐(코로나 걸렸을 때도 입맛은 좋았어요) 부모님이 보내주신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전쟁이 나도 당장에 식량 걱정은 없다. 야호?!
친구랑 둘이 동거하면서 당연히 원룸 살 때 보다 집 크기가 커졌다. 덩달아 냉장고 크기도 커졌다. 나의 부모님은 냉장고 크기가 커진 것을 제일 반기셨다. 그동안에는 냉장고가 작아서(시원찮아서) 뭘 보내줘도 이게 다 들어갈까 걱정하셨지만, 이제는 양껏 넣을 수 있다. 또 친구랑 싸우지 말고 같이 맛있게 먹으라며 반찬의 양도 두 배로 늘었다. 서른 넘은 딸이어도 엄마 눈엔 아직도 응애~ 베이뷔 인가보다. 엄마가 보내주신 밥과 반찬, 어떨 땐 국까지 가득 찬 냉장고 문을 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그런데 이런 엄마의 마음이 우리 엄마뿐이랴. 동거인 엄마도 마찬가지~! 휴가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동거인이 곧 택배가 갈 거니까 냉장고에 넣어두고 저녁으로 먹으라며 카톡을 보냈다. 궁금해하며 배송 온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니(명품 언박싱 보다 더 기대되는 순간) 각종 반찬, 쭈꾸미 밀키트, 한우, 보리굴비, 심지어 보리굴비와 먹을 녹차물까지! 산해진미가 다 들어있었다. 보리굴비 이름도 사대부집 곳간이다. 얼렐레~ 내가 정말 사대부집 딸내미랑 사나 보다. 동거인 어머니가 곳간을 터신 게 분명해! 뭐가 냉동이고, 냉장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맛있게 먹는 요리법도 알려주셨다.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어머님 은혜의 한 소절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두 딸내미는 어머니들의 은혜로 당분간 뭐 먹을지 고민 없이 열심히 냉장고 파먹기를 하면 될 거 같다. 친구랑 같이 동거하니 엄마가 두 명이나 있는 기분이다. 두 명의 엄마가 보내주는 음식들로 냉장고가 터질 것 같지만 아주아주 행복하다. 이럴 땐 어머니들의 넉넉한 인심만큼 나도 넉넉한 위장을 보유하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또, 동거의 좋은 점은 상대방의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큰 기대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저 둘이 싸우지 말고 재미있게 살면 돼~"라는 마음으로 나의 동거인 음식 취향을 물으시고, 가장 예쁜 과일을 골라서 보내주신다. 동거하지 않았으면 못 느꼈을 친구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과 입으로 풍족하게 느끼고 있다. 따로 친구 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아도, 우리는 각자 서로 센스를 발휘해서 "보내주신 거 맛있게 잘 먹었어요. 친구도 엄청 맛있대~ 역시 우리 엄마 요리 솜씨가 짱이야!"라며 내 마음에 친구의 마음을 보태서 연락을 드린다.
결혼을 안 해서 친정엄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만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친정엄마가 두 명이나 생긴 기분이다! 이것 은 바로 '누워서 떡 먹기' 보다 행복한 '누워서 반찬 받아먹기'의 동거 생활. 동거를 시작하며 책장 합치기로 우리 집엔 똑같은 책이 두 권이나 있는데, 냉장고 합치기로는 각기 다른 어머니들의 손맛이 모였다. 어머니들이 보내 주시는 반찬을 열심히 먹으며 철부지 딸로 살어리랏다~
두 어머니들은 이 브런치 글을 못 보시겠지만 정말 어머니들의 사랑에 호강하고 있어요. 사랑해요! 보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먹어치우겠습니다.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