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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기회 Sep 04. 2024

이별의 5단계를 거쳐 서울 월세방 구하기 1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는 더 구립니다.

여둘살이*를 결심하고 반값월세** 작전을 펼치기 위해 퇴근하고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식구가 될 운명이니(내 마음으로 이미 정함) 우선 저녁을 배부르게 먹을 계획이다. 마침 메뉴도 샤브샤브 뷔페.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에 적극 찬성하는 먹보로서 우선 친구를 배부르게 먹일 작정이다. 부른 배에 마음이 넉넉해지면 우리의 핑크빛 여둘살이를 찬성하겠지?

*여둘살이: 여자 둘이 산다는 말의 줄임말

**반값월세: 같이 살면 월세를 둘이서 나눠내니 말 그대로 반값 월세


이제 밥을 다 먹고 후식을 고민하는 틈을 노려 기습공격에 들어갔다. "우리 같이 살래?" 친구의 반응을 보니 같이 살자는(live) 내 말의 의미를 뭘 사자고(buy) 이해한 거 같다. “뭘 사??" 정말 몰라서 묻는 순수한 표정에 잠시 당황 했으나 이제 정신을 차렸다. "아 그게 아니고~~" 나는 진지하게 (조금은 흥분해서) 우리의 여둘살이 계획의 기대효과와, 경제적 이점을 거창하게 설명했다. (친구도 혹하겠지?? ) 근데 나의 기대와 달리 친구의 반응은 "재밌네ㅋㅋㅋ" 정도였다. 우리의 핑크빛 여둘살이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내가 아니지.


그날 이후로 친구에게 잊을만하면 카톡을 보냈다. 황선우x김하나 작가의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책 에피소드를 말하며 "어때!! 우리도 이렇게 살면 너무 재밌겠지!", 거실에 소파와 티비 대신에 넓은 식탁을 둔 사진을 보내며 "우리도 거실에 식탁 놓고 같이 밥 먹고 책도 읽으면 좋겠다~" 이렇게 친구에게 우리가 함께 살 미래를 은은하게 영업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친구의 반응도 '생각해 볼게' 였다가, '음 상상해 보니까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로 변하더니, '현실적인 거 생각하면 괜찮긴 해'로 바뀌었다. 먹구름 사이 한 줄기의 빛이 보인다...! 친구도 가상 여둘살이에 서서히 젖어들더니 마침내 “걍 해봐?"라며 홀라당 넘어왔다. 아싸! 이제 같이 살 친구도 있겠다. 집만 구하면 된다! 이때까지도 진짜 여둘살이를 실현할 생각에(황선우x김하나 작가님들의 팬으로서 이것 또한 성덕 아니겠는가) 마냥 신이 났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집을 구하기 전에 웰세방의 예산과 조건을 협의했다.


- 보증금 최대 3천만 원, 월세 최대 120만 원

- 가스레인지랑 에어컨은 옵션

- 2~3룸이고 거실이 작게라도 있을 것


이렇게 기준을 정하고 각자 네이버부동산과 직방을 뒤져서 매물을 스크랩했다. 일주일 뒤 줌으로 만나서 서로 찾은 매물 중에 실제 보러 갈 곳들을 선별하고, 부동산에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우리가 같이 살 집을 보러 갈 생각에 마냥 설렜다. 그리고 바로 원하는 집을 구했으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쉽게 흘러갈리 없죠. 이때부터 이별의 5단계를 단계 단계 아주 철저히, 끈질기게 겪었다. 부동산 영역, 집 구하기는 마음먹는다고 계획대로 되는 게 절대 아니었다.


이때 어딜 가든 집만 보였다. 한강에 놀러 가서도 남산타워가 아닌 한강뷰 아파트들에 더 눈길이 가더라.. 부동산무새..



이별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다.

하나의 단계라도 사뿐히 넘어갔으면 좋았겠지만, 미련 잔뜩 남은 전 연애의 기억처럼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1단계, 부정.

아니 이렇게나 괜찮은 매물이 없다고? 막상 집을 보러 가니 사진으로 봤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아니 구렸다. 사진을 광곽으로 찍은 건지 실제 들어가니 너무 좁았다. 거실이라 생각한 공간도 거실이 아니라 부엌 앞에 있는 공간 정도? 집이 괜찮다 싶으면 동네가 너무 위험해 보였다. 아니면 숨을 헉헉대며 언덕을 올라야 있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아니야, 이럴 수 없어, 이게 정말이니, 내가 생각한 여둘살이 집은 이게 아닌데..


2단계, 분노.

온라인으로 봤을 때 별로일 거 같은 집은 실제로 가보면 정말 별로가 맞았다. 매물을 많이 보러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었음을 깨닫고 매물 찾는 기준을 추가하였다.


- 전용면적 12~13평 이상일 것 (공급면적이 아닌 전용면적을 봐야 한다. 공급면적 12~13평이면, 전용면적이 8~9평인데 둘이 살기에는 너무너무너무 좁다)

- 채광이 좋고, 언덕이 아닐 것(이건 필수는 아닌데 희망사항이어요)


이제 부동산 매물 찾는 고수가 되었다. 매물 사진만 보고 덥석 집을 보러 가는 건 아주 초보적인 실수지~ 그동안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 평수와 구조도 확인하고, 미리 로드뷰로 건물 외관이랑 동네도 살펴본다. 로드뷰를 보고 1층에 식당이 있는 집은 벌레가 많이 나오니까 패스. 앗, 이 골목은 영화 범죄도시에 나올 것 같아서 패스. 꼼꼼하게 매물을 살피니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이 없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서울 부동산 가격 진짜 미친 건가(심한 말). 집을 보러 다니니 뉴스에서 언급하는 서울 집값이 피부로 느껴졌다. 도대체 이 집 컨디션에 이 가격이 맞아?? 대답없는 물음을 던지며 나의 분노는 쌓여만 갔다.


3단계, 타협.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데, 내가 서울을 떠날 수는 없고... 그날도 퇴근해서 친구랑 집을 보러 갔는데 역시나 허탕이었다. 월세나 보증금 가격을 더 높여서 찾아야 하나? 싶었지만, 보증금이 더 높아지면 애초에 월세집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월세 140만 원도 큰 거 아냐? (집 구하러 다니다 성격 나빠짐) 부동산 사장님 말씀이 원래 투룸 매물이 더 귀하다고 한다. 여둘살이를 하기로 하고 매일 서로의 카톡방을 울리며 매물을 공유하고, 발품 팔아 다녔는데.. 아쉽지만 우리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 깜깜. 여둘살이가 힘들 수 도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각자 여둘살이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플랜B를 세우기로 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를 연장해서 계속 살지, 1.5룸 월세로 이사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우리의 카톡방 알람도 멈추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올여름도 지난여름과 마찬가지로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하고, 길고 긴 장마가 이어졌다. 뉴스에선 연신 서울 아파트 가격이 다시 상승한다고 보도했다. 매년 여름 비슷하게 반복되는 날씨와 부동산 소식일 텐데 올여름에는 유난히 더 어둡고 무겁게 느껴졌다. 자가, 전세, 월세 상관없이 모두가 집에서 만큼은 안전하고 평온하게 한 여름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타협을 해서인지, 열대야로 잠이 안 오는 건지, 어쩐지 바로 잠들기가 어려운 여름 밤이 이어졌다.



책: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에그타르트를 좋아해요





작가 코멘트.

한 달 동안 집을 보러 다니며 좌절하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서 알아보다가,

또 분노하고 슬퍼하던 시간에 대해 적으려니 왜 이리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요...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이별의 5단계 우울과 수용은 이어서 적을게요.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아늑한 집에서 편안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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