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의 첫 장면들을 보면 웃음이 난다. 꼭 나 같아서. 영화 볼 시간이 없는 분들은 초반 10분 정도만 보기를 추천한다. 첫 장면은 다양한 나라의 여자들이 나오는데 (얼굴도, 나이도, 쓰는 언어도 모두 다르다), 친구들에게 연애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얼굴과 언어가 달라도 여자들의 고민은 모두 동일하다. 바로 데이트한 남자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 영화에서 고민을 들을 친구들의 반응도 한결같다.
"그 남자 자격지심 있어서 그래"
"네 전화번호를 잃어버린 거야"
"네가 성공한 여자라 기죽어서 그래"
이 장면을 보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친숙해... 꼭 나와 내 동거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도 (전)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다툰 뒤에 집에 오면 동거인의 방문 앞에 걸터앉아 고민을 털어놓았다. 고민을 말하다 보면 말하는 행위에서 기분이 후련해진다. 또, 내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말하는 동안 나도 내 행동을 되짚어 보게 되고(말로 하는 일기 쓰기 같다) 동거인의 조언을 들으며 내 감정에서 거리를 두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시야가 생긴다.
보통 나는 고민을 털어놓을 때 동거인이 F의 공감이 아니라 T의 이성으로 내 행동을 중립적으로 봐주길 기대한다. 핵심은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야?"이다. 고민의 당사자인 나는 감정적으로 과몰입되어 있을 때가 많아서 동거인의 이성적인 면모가 도움이 된다. 이렇게 고민을 말하고 조언을 듣는 시간 속에 어느새 진짜 내 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내 안에 이미 정답은 있지만 그 마음을 나도 모르겠을 때, 확신이 없을 때, 친구의 조언은 진짜 내 마음에 다가가는 좋은 징검다리가 된다.
예를 들어, 모임에서 만난 남자에게 호감이 생겨 먼저 연락해 볼까 고민이 될 때 친구의 반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래 연락해 봐! 이고,
다른 하나는 좀 빠르지 않아? 이다.
이 말을 들은 나의 반응도 ‘바로 연락해 볼게' 이거나, '그럼 먼저 친해지고 생각해 봐야겠다'이다.
물론 친구의 조언과 내 마음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친구는 연락해 보라고 했지만 망설여져서 포기하거나, 아직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상대에게 연락을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나의 이런 모습에 친구들은 "너 답정너지!"라고 응수한다.
답이 정해진 거 같으면서도 아직은 그 답이 물음표 일 때, 친구에게 고민상담을 하면 어느 순간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한다. 우리는 사실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내 마음에 확신이 필요해서, 내 행동에 응원을 받으려고 제 3자에게 고민을 말하는 게 아닐까? 매번 나의 고민을 흥미롭게 들어주고, 진심으로 상담해 주는 친구들의 존재가 내 인생의 가장 큰 느낌표다. 친구들아 못난 나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잦은 연애 고민 상담은 지양하기를 추천한다. 특히 연애 중일 때 반복해서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나 상대의 행동이 있다면 친구가 아니라 연애 당사자들끼리 터놓고 말해봐야 한다. 이미 연애 중이라면 그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커플끼리의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 연애 상대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면, 그 고민이 켜켜이 쌓여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갑자기 연애고민 상담 글처럼 되어버림ㅋㅋ 내가? )
그런데 아직 사귀기 전이라면 내 경험으론 친구의 조언이 도움 될 때가 많이 있다. 호감 가는 상대가 생겼거나, 이제 썸 타는 관계라면 그때는 상대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이 관계에 확신도 없다. 수시로 갈팡질팡 한다. 그래서 그럴 때의 고민 상담은 원하시는 만큼 하시라~ 웰컴~ 사실 이때의 고민상담은 듣는 상대방도 재밌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국엔 이 고민에 대한 정답도 내 안에 있다. 연락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것. 연애도 사랑도 다 내가 행복하려고 하는 건데 내 마음 이끄는 대로 하면 좋겠다!
한 번은 내가 관심 있는 상대에게 먼저 연락을 했는데 카톡 답장 간격이 3~5시간이라서 갑자기 화가 났다. "이렇게 답장이 느리면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아냐? 나도 그냥 정리할래. 기분 나빠"라고 말하니까 동거인이 내게 참 해결책을 주었다.
내 상황에 과몰입하거나 급발진하게 될 때 스스로 ‘나는 솔로' 출연진이라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나는솔로를 보면 아직 만난 지 1~2일 차이고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인데 나와 감정의 크기가 다르다고 혼자 급 관계를 정리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보는 시청자로서 나는 아니 왜 혼자 오버야??? 왜저래~~ 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렇듯 나도 내 연애의 시청자 모드가 되는 것이다.
동거인의 예시를 듣고 "앗, 방금 내가 영자 같았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행히 한 템포 천천히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나여도 친구의 조언으로 사람 구실 하며 꺼져가는 썸도 어찌어찌 살려 연애를 하기도,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도, 또 (간혹) 호감 가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내 곁에 남자들이 스쳐갈 때 영화 속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던 여자친구들처럼 나에게도 든든한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하게 만드는 남자는 별로인 거 같다. 고민하는 시간이 아깝다. 흥!
앗.... 또 급발진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