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의 풍경
약속이 없는 어느 주말엔 알람을 끄고 자고 싶은 만큼 자다가 느지막이 일어난다. 주섬주섬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아점을 먹고 또 늘어지게 누워서 유튜브를 본다. 넷플릭스로 뭘 찾아볼 생각도 않고 알고리즘에 맡겨진 채로 영상을 보다 보면 훌쩍 두 시간이 흘러있다.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늘 하루는 게으름을 만끽하며 집에서 쉴 것인가, 아니면 마실 삼아 동네 카페에 다녀올 것인가.
노트북으로 할 게 있어서, 커피랑 디저트가 먹고 싶어서, 가고 싶은 카페가 있어서 등등 그때마다 다른 이유와 함께 카페 갈 마음을 먹는다. 후다닥 씻고(혹은 모자를 눌러쓰고) 잔스포츠 백팩에 노트북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나가기 전에 귀찮아서 망설였지만 막상 나오면 기분이 산뜻해진다. 룰루.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는 나의 카페 취향은 너무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에, 작업하기 편안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서정적인 음악(클래식,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다. 통창이라 바깥이 훤히 보이면 더없이 좋다. 연희동의 본지르르와 프로토콜, 보문동의 내음성 카페를 조심스레 추천한다.
장소가 주는 힘을 믿는 편이다. 장소가 바뀌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고 외부의 자극에 영감을 얻는다. 카페에서 집중한 사람들을 보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괜히 호기심도 생긴다. 요즘은 카페에서 한강 작가님의 소설책을 읽는 분들이 눈에 띈다. 정말 텍스트힙이 유행이려나?
카페라는 하나의 공간에 모여 있지만 각자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하거나, 소곤소곤 이야기 하는 분위기를 더없이 좋아한다.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카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나도 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잠시 세상을 향한 스위치를 꺼둔다.
지난 시절에는 뭔가 해내야 할 때 카페에 가서 침착한 시간을 보냈다. 카페가 없었으면 그 많은 것들을 대체 어디서 했으려나? 싶다. 취준생 때는 주로 스타벅스에서 자소서를 쓰고 면접 준비를 했다. 당시엔 소이라떼(두유라떼)와 자몽허니블랙티를 돌아가며 마셨다. 회사 다니며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할 때도 카공족이 되어 카페에서 인강을 듣고 공부를 했다.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지겨워져서 카페에 가면 기분전환도 되고 한정된 시간에 집중도 잘 됐다.
요즘은 카페에서 주로 책을 읽거나 브런치 글을 쓴다.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 <자유로울 것>에서 작가님도 루틴처럼 카페에 가서 소설을 써 내려간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아이를 등교시키고, 작가님은 카페로 출근해서 오늘 하루치의 글을 쓰셨다고 한다.
혼자 카페에 가면 좋은 점이 뭐라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퇴근하고는 피곤함을, 주말에는 귀찮음을 이기고 카페에 왔으니 커피값만큼 뭐라도 하고 가겠다는 보상심리가 작용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확 좋아지기도 하고(요즘은 플랫화이트+산미 있는 원두 조합에 빠져있다), 손님이 데려온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꺄아~" 잠시 행복해진다. (귀여운 게 최고야) 카페에 갔는데도 딴생각만 나고 뭐가 잘 안 풀리는 날이면 영 안 되는 날인가 보다~ 하고 마음 놓고 놀아버린다.
우연히 카페에서 재미난 풍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내 옆에 앉은 남녀가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사이 같다. 왜냐면 서로 존댓말을 하며 퇴근하고는 뭐 하세요? MBTI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일부러 안 들으려고 짐짓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는데도 귀가 활짝 열린다. 내 모든 감각이 청각에만 쏠렸나 보다. 내 딴에는 티 안 나게, 무신경한 태도로 (과연 티가 안 났을지) 대화를 엿들으며 과연 저 두 사람은 커플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 본다. (행복하세여~)
앗차차, 나 글 쓰려고 카페에 온 거지. 다시 정신 차리고 내 앞의 흰 바탕과 깜빡이는 커서에 다시 집중한다.
실패...
아무래도 노트북을 접어야겠다. 더 진도가 안 나간다.
카페마다 분위기가 다른 것도 재밌고, 커피값을 지불하고 그 공간을 잠시 향유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취향이 잔뜩 담긴 카페를 찾아다니는 일은 일상을 환기하는데 도움이 된다. 일상에 새로운 공기 불어넣기.
집과 회사를 반복하는 일상의 틈에서 카페 가기는 반복 속의 변주이자 나의 리추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