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반이 남자라는데

그중의 괜찮은 남자는 반의 반의반

by 위기회

송년회 할 겸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이라 해봤자 나까지 다섯 명)을 만났다. 영문학 전공이라 영문도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비슷한 시기에 같이 졸업하고 취업도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 장소는 개강총회 마치고 갔던 뒤풀이 장소였다. 대학교 근처 반지하 술집이었는데 낮이나 밤이나 일정하게 어둡고 가성비 좋은 안주를 많이 팔았다. 가뜩이나 공간이 어두운데 우리는 각자 5~10분 정도 지각을 해서 제일 구석지고 좁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어색하게 인사하고 어디서 왔는지(의정부, 대전, 서울 등 출신지가 다양함), 정시인지 수시인지를 이야기하며 금방 친해졌다.


대학 시절 내내 뒤풀이 장소를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알고 보니 가게 이름도 술줘 밥줘. 배도 채워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는 우리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점심엔 제육과 닭볶음탕 같은 메뉴로 배를 채우고, 저녁엔 파닭과 치맥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매일 수업을 같이 들어도 얼굴만 보면 새로 할 이야기들이 생겼다.


당시엔 순하리와 자몽에 이슬 같은 소주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술맛이 안 난다고 연거푸 마셨다가 금방 취해버렸다. 그러면 또 서로 취한 모습을 사진 찍어서 놀리고, 헤어진 전남친 생각에 울고 다시 떠올리니 정말 진상이었다. 우리의 찌질했던 모습에 혀를 차셨을 술줘밥줘 사장님께 뒤늦은 죄송과 감사를 전합니다.


그렇게 술줘밥줘는 우리의 흑역사와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다.


오랜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괜히 아련해져서 별 생각이 다 난다. 연말이라 그런지 옛날 생각에 젖어 든다... 아 느끼해.. 다시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약속장소로 간다.




오늘의 모임 장소는 신용산에 있는 심퍼티쿠시이다. 발음도 어렵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심퍼티쿠시 보다 술줘밥줘가 훨씬 낫지. 얼마나 직관적이야. 우리의 만남 장소는 제법 우아하게 바뀌었지만 우리가 하는 말은 대학생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행 맞아?)


달라진 건 교수님 대신 직장 상사 욕을 하고, 서로 웃을 때 눈가 주름을 신경 쓰는 정도? 아, 또 우리 중에 수이는 남친이 아니라 남편이 생겼다. 수이는 작년에 결혼해서 우리 모임의 유일한 기혼자가 됐다. 아 또 달라진 건 주량도 많이 줄었네... 이젠 다섯이서 와인 한두 병 이면 충분하다. 줄어든 주량에 비해 아직도 식욕은 왕성해서 여전히 많이 먹는 것도 다행이다. (오 다행 맞아?)


만나서 근황 토크를 하다가 다섯 중 셋이 솔로라 연애 이야기로 흘러간다. “요새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 “최근에 소개팅한 거 없냐”


대학 때는 소개팅, 미팅의 기회도 많았고 스펙을 쌓으려고 시작한 대외활동에서도 맘에 드는 사람이 있었다. 학과의 성비도 남녀 반반이고 군대 다녀온 복학생들도 매년 생기는지라 그 안에서 사귀고 헤어지고 갈아타고 나름 사랑과 전쟁을 찍었다.


그렇게 내가 살던 세상의 절반은 남자였는데 이제는 다 같은 남자가 아니고 나쁜 놈, 이상한 놈, 괜찮은데 결혼한 놈, 괜찮은데 여자친구 있는 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지 않은 놈, 괜찮은 놈이다.


이러니 정말 괜찮은 솔로 남자 찾기가 어렵다. 괜찮은 소수점의 남자를 노리는 괜찮은 여자가 아주 많다.




연애하고 싶어도 연애 혼자 하냐,

주변에 괜찮은 놈이 있어야 연애를 시작하지.

아 모르겠다 술이 나 마셔.

짠~


하는데 호은이가 눈을 반짝인다. 호은이는 우리 중에 제일 쉬지 않고 연애를 하는 친구다. 그래서 호은이와 연애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이번에 만나는 애가 그때 걔야?" 라는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우리 사이의 룰이다.


옆에서 보기에 항상 연애를 잘하고 있어 연애면에서는 걱정 없는 호은인데 호은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백했다


나 사주 연애운 보고 왔어!


사주???????? 왜?????

너 결혼하려고???? 궁합 본 거야????


우리가 질문 폭격을 하자 호은이가 고백했다.


아니 나 전남친이랑 헤어지고 너무 우울한 거야. 남들은 연애 오래 잘하는데.. 나는 매번 새로 누구 만나서 연애하는 것도 지치고.... 10년 동안 1명 만나는 게 1년마다 10명 만나는 것보다 훨씬 정신건강에 좋다니까? 나도 이제 그냥 한 사람 잘 만나서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싶어. 그래서 용하다는 철학관 소개받아서 사주 보고 왔지. 연애운 물어봤는데 진짜 용하더라!! 완전 잘 맞아. 전남친 별로라면서 전남친한테 연락할 생각 말고 기다리면 찬바람 불 때 새로운 남자 들어온다고 했거든. 근데 진짜 맞아. 추워질 때 지금 남친 소개 받았거든.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긴 한데 이번엔 느낌이 좋아. 엄청 착하고 나한테 잘해줘!!



뭐?

꽤나 잘 만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남친이랑 헤어졌다고?

근데 지금 새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그걸 사주에서 맞췄다고? 시기까지?!


우리는 호은의 충격 고백에 잠시 벙찌다 일심동체로 외쳤다.


그래서 거기가 어딘대!!!

나도 사주 보러 갈래!!!



새해엔 역시 새해 목표, 그리고 신년운세? ㅋㅋㅋㅋㅋ



(다음은 친구 따라 강남에 있는 철학관에서 사주 연애운과 신년운세를 보고 온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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