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괜찮아선 마음이 안 움직여
30대 연애는 체력전이라고 했나요? A에게 시간 되면 만나자고 카톡을 보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리다 열두 시가 되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무리 사랑이 좋아도 월요병을 퇴치하려면 잠을 자야 해. 사랑의 엔돌핀을 이기는 현대인의 질병은 월요병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 뜨자마자 카톡부터 확인했다. A에게 답장이 와있었다.
좋아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제가 이번 주는 회사 일로 바빠서 다음 주에 괜찮아요.
카톡을 확인한 뒤 입가에 흘러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채 기분 좋게 출근 준비를 했다. 출근길에 담백하게 카톡 답장을 보냈다.
넹ㅎㅎ 오늘 날씨가 넘 춥네요
따숩게 입고 출근하세여!
역시 난 담백함과 거리가 먼 사람. 나름 귀여워 보이는 이모티콘도 하나 보냈다. 사람이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 기침, 가난, 그리고 사랑이다. 우하하 아 정신 차려. 오버 금지. 나는 성숙하고 여유 있는 30대 녀성이라구.
그런데,
아 또 ‘그런데’다. 아 ‘그런데’ 정말 눈치 좀 챙겨. 이제 좀 내 연애에서 빠져줄 수 없는 거니?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내 연애는 늘 변칙과 반전 '그런데'의 연속이다.
(다시 돌아와) 그런데 아침에 출근하며 A에게 보낸 카톡에 퇴근 시간까지 답장이 없다. 카톡을 읽지도 않았다. 아직 나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기분 나쁠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타일렀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한다. 이런 식으로 A와 나는 일주일 동안 카톡을 하긴 하는데 이건 카톡을 했다고 해야 할지.
아침에 카톡 하면 오후 늦게 답장이 오고(3~4시쯤 오늘은 칼퇴하시나요?), 퇴근 때 카톡 하면 거의 밤늦게 (10시쯤 퇴근하고 운동하고 왔어요.) 답장이 왔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A에게 보내는 카톡은 마치 새 다리에 편지를 묶어서 보낸 뒤에 답장을 기다리는 일 같았다. 오히려 내 카톡을 A가 씹거나 하트를 누르면 나도 알아듣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길 텐데 정말 열 몇 시간 뒤에 잊을만하면 답장이 왔다.
이렇게만 봐서는 어장 같지만 내가 본 A는 어장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A는 착하고 진중하고 내향적인 사람인데, 단지 그는 연애 좀 해본 30대 남자라 그의 우선순위에 내가 없었을 뿐이다.
이때 처음 알았다. 먼저 연락을 보내는 것보다 언제 올지 불확실한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을. A의 카톡 답장을 기다리는 일에 자존심이 상해갈 즈음, A와의 연락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음을 실감하고 A가 보낸 카톡에 하트를 누르고 대화를 마쳤다.
그러면서 내심 A가 먼저 선톡하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연락은 없었다. 아마 지금 예상하건대 A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그 정도로는 A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나 보다. 또 실제로 일이 바쁘기도 하고 그 바쁨 속에서 나란 사람이 궁금하거나, 만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겠지. A에게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일 뿐 연애하고 싶은 사람은 아닌 거다.
나는 작은 관심과 호감에도 이 사람이 궁금하고 일단 만나서 대화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A는 적당히 괜찮기만 해서는 호감이 안 생기는데? 큰 호감 없는 상대에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런 궁예도 의미 없는 게 A의 마음은 A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다행히 뭐 진행된 것도 없어서 A와의 일은 금방 잊고 별 일 없이 잘 지냈다. 이럴 때 다행인 점은 나의 탁월한 정신승리 능력으로 '아님 말고~' 해버리는 거다. 그렇게 A도 아님 말고가 됐다.
친구들을 만나서 A 이야기를 꺼내면 친구들 반응을 듣는 것도 재밌었다. 내가 호감의 표시를 직접적으로 해서 부담스러웠을 거 같다고 천천히 지내다가 연락해 보지, 와인 모임 끝나고 연락해 보지, 바로 언제 만나자고 날짜 잡아보지, A가 답장 느려도 더 적극적으로 해보지 등등 ‘만약에 이렇게 하면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친구는 지금 다시 연락해 보라고 했다. 이 도파민에 중독된 사람아~ 자기의 유희를 위해 친구를 팔아먹다니!
이번 일로 배운 게 있다면 현실에서 '만약에'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것은 지난 나의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고 그 자체로 시간 낭비다. 그래서 이 정도면 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만족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A와 카톡이 끊긴 뒤에 와인 모임에서 A를 두 번 정도 더 만났다. 서로 뭘 한 게 없으니 만나서도 딱히 어색할 것도 없었다. 성숙한 어른의 모습인양 그동안 잘 지내셨냐고 안부를 묻고 다른 모임 멤버들과 섞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임이 끝나고 뒤풀이에도 A와 나도 모두 참여했다. 뒤풀이에선 괜히 더 많이 웃고 즐거워하며 사람들과의 대화를 이끌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내가 그날따라 유난히 밝 고 즐거워 보인다고 말했다.
아마 모임에 사람들은 몰랐겠지. 물 위의 백조가 여유롭게 보여도 수면 아래에선 발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중이란 걸.
A는 알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