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제독은 일본 해군의 주요 지도자로서,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의 전략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미국의 압도적인 산업 및 경제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일본이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미국의 군사 생산 능력과 자원 동원이 일본을 압도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당시 미국에 무관으로 있었던 지미파였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다루는 영화에서 미국 유학 시절을 회상하는 모습
이 다 다르다.
1981년도 영화 " 연합함대"에서는 부정적이었던 미국시절로 회상하고 2011년도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는 아련한 젊을 때 추억을 하는 듯이 미국 생활을 이야기한다.
최근영화에서는 진주만 폭격 후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는 나레이션을 하고 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워싱턴 D.C. 에서 일본 대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는 그의 경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미국 해군 및 군사 시스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는 계기가 되었다.
야마모토는 미국에서 해군 전략과 기술을 관찰하며 많은 통찰을 얻었으며, 특히 미국의 경제력과 산업 기반이 군사적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했다. 이는 훗날 그가 일본 해군의 전략을 설계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미국 내에서 항공 기술이 해군 작전에 미칠 가능성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이후 일본 해군 항공 전력의 발전에 기여했다.
야마모토는 미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미국인들과의 교류에서도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는 브리지와 같은 카드 게임을 즐기며 사교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를 통해 미국 내 인맥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이 경험은 그가 나중에 태평양 전쟁 동안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도 미국의 강점과 약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는 일본 군부 내에서 미국과의 전쟁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산업력과 장기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경계했지만,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견해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그는 전쟁 초기에 빠르고 강력한 공격(예: 진주만 공격)을 통해 미국이 평화 협상에 나서게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완전히 승리로 이끌기보다는 유리한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계산을 하는 전략가였다.
야마모토는 유명한 발언으로,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마음껏 활약할 수 있겠지만, 그 후에는 전혀 자신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이 단기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강력한 반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야마모토는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가능한 최선의 전략을 실행하려 했다.
2. 과연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명장이었는가?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긍정적인 면 이외에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에 대해 제2차 세계 대전 역사가들을 몇 가지 단점과 한계가 지적한다.
우선 진주만 공격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부재했고, 전략적 핵심 시설(연료 저장고, 수리 시설 등)을 파괴하지 못했다.
(1981년 영화 연합함대에서는 폭격 후 항공모함이 하나도 폭파된 적이 없다는 보고 후에 실망한 모습이 역력하다 )
결국 미국을 완전히 무력화하지 못한 채 참전을 유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일본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야마모토는 해군력 우위를 통한 단기 결전을 선호했으나, 이는 미국과의 장기전에 부적합했다.
미드웨이 해전(1942)에서 공세적 전략을 고수하다가 결정적 패배를 겪었다.
그리고 미국의 방대한 산업력과 전쟁 동원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단기 결전으로 승리를 확신했으나, 미국의 생산력과 인적 자원 동원 능력에 밀려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미국파출신인데도 미국의 무서움을 몰랐다)
또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불명확한 명령과 복잡한 작전 계획으로 혼란을 초래했다.
지나치게 복잡한 작전 계획은 예하 지휘관들의 오해와 혼란을 불러왔다.
야마모토는 개인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으나, 일본의 군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군사 지도자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오프닝 장면에 육군 전투병력이 해군성 정문 앞에서 무력행동을 하는 모습이 보이고 해군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보인다.
1943년 당시 일본 군부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미워했던 이유는 주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이다.
우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신중하고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공업력과 자원력이 일본보다 월등히 우세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입장을 고수했다.
“6개월에서 1년은 일본 해군이 우세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을 강경하게 추진하던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불만을 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해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당시 일본 내에서 육군과 해군 간의 경쟁이 심각했다. 특히, 육군은 중국 대륙 침략을 중심으로 한 대륙 전략을 선호했지만, 야마모토는 해군 중심의 태평양 전략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육군 강경파들과의 마찰이 심했다.
가장 큰 원인은 1941년 야마모토가 주도한 진주만 기습 공격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미국 항공모함이 무사했고, 일본이 장기적으로 불리한 전쟁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1942)에서 일본 해군이 대패하면서, 야마모토의 전략적 판단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또한 야마모토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었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며, 미국의 잠재력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적, 친미적인 태도는 당시 군국주의적이고 반미 감정이 고조된 일본 군부 내에서 반감을 샀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죄인 시절)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은 우연한 미군의 공습이 아니었으며, 미국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암살 작전의 결과였다. 이 사건은 1943년 4월 18일에 발생했다.
야마모토의 죽음은 미국의 **암호 해독(코드명 매직, Magic)**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
미국은 일본 해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여, 야마모토의 시찰 일정을 입수했다.
야마모토는 솔로몬 제도의 부겐빌 섬 전선 시찰을 위해 1943년 4월 18일 비행기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그 일정을 미국이 완벽히 파악했다.
이에 미국은 야마모토 제거를 위한 특수 작전(복수 작전, Operation Vengeance)**을 계획했다.
미 육군 항공대은 P-38 라이트닝 전투기 16대를 동원했다. P-38 전투기는 사거리가 길어 해당 임무에 적합했으며, 일본군의 요격을 피하기 위해 해상 비행경로를 설정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G4 M1 "베티" 폭격기를 타고 이동 중이었고, 미국 전투기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야마모토의 비행기는 정확하게 공격받아 격추되었고, 그는 즉사했다.
시신은 좌석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고, 두부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한다.
일설에서는 비행기 격추 이후 충돌로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두부 총상과 격추 직후의 사망 사실로 인해 고의적인 사살 즉 추락 즉시에는 살아 있었다는 가정 하에 제3의 총격이 한번 더 있었다는 가설도 있다
아무튼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찹쌀떡을 물에 말아먹는 먹방 덕에 몇 글자 적어보게 되었다. 그나마 그 험난한 시기에도 일본에 이 인물이 살아있었다면 전쟁의 판도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것이다. 대본영에 그나마 바른말 먹히는 인물이 죽었으니 남은 둔재들이 무모한 소모전으로 일본 패망의 길에 들어간 것은 어쩌면 사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