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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직 주재원 생활은 어때요

by nay

회사를 다니면서 가질 수 있는 몇 개의 기회 중 하나로 해외 주재원을 서슴없이 꼽을 수 있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보통 3-4년에 한 번씩, 길게는 5-6년에 겨우 한 두개의 자리가 나는 귀한(?) 보직이다. 그래서 기회만 된다면 다들 한 번 정도 꿈꿔보는 자리기도 하다. 한국과 비교해서 생활환경, 치안, 나라의 발전 정도 등에 따라 비선호 국가의 주재원이 될 수도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상대인 중국을 비롯,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 연구원 자격으로 지원 가능한 주재원 자리가 있다. 그리고 내가 현재 근무하는 싱가포르에도 주재원 기회가 있다.

박사 과정 중 미국에서 1년 정도 살아 본 경험이 있어 해외 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것은 없었다 (게다가 그 해는 911 테러가 있었던 2001년이라 미국이란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언어에 대한 부담은 개인차가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주재원에 지원할 생각을 갖고 있다면, 내부적으로 요구하는 수준 (우리 회사의 경우 OPIc IH 이상)을 준비해 두었으리라 본다.


처음에 발령 받을 때는 1년 단기 파견이었다. 주재원에는 다른 분이 이미 계셨고, 내가 파견 나온 포지션은 1년 정도 글로벌 연구 업무를 수행하면서 경험을 쌓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1년 단기가 추가 2년 주재원이라는 자리로 바뀌어 현재 3년 차 해외 근무를 하고 있다.


1. 연구직 주재원은 대체 해외에서 무슨 일을 할까?

영업이나 마케팅이 아닌 연구소 직원이 해외에서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 회사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다. 제품의 수출입에 관련하여 상당한 양의 paperwork이 있다. 물건을 팔 수 있도록 등록하고, 법적으로 문제있는 표현이나 성분은 없는지, 각 나라별로 동일 성분에 대해서도 규제 기준이 다르므로 문제는 없는지 등등을 모두 점검한다. 이때 한국과의 긴밀한 소통은 당연히 필요하다.

다음으로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제품 개발 아이디어 제안이 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구글링 열심히 한다해도 현지 시장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객을 직접 만나야 새로운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고객을 통해 해당 시장에 맞는 제품, 소통의 방법 등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오픈이노베이션이라고 부르는 업무다. 스타트업을 비롯, 새로운 기술개발의 기회와 현지의 능력있는 연구진들과 협업으로 이른바 역혁신을 이룰 기회를 찾는다.


2. 보상체계는 해외에서 살기에 충분한가?

어쩌면 해외 근무를 준비하거나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현지에서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주재원이 되니 무엇보다 회사에서 보상 체계가 많이 다르다. 단기 파견은 개인 1인을 기준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가족에 대한 지원사항이 거의 없는 반면, 주재원은 보다 가족 중심의 케어를 해주는 구성이다. 어느 회사나 비슷하겠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지원이 이뤄진다. 현지 물가를 고려해서 생활 보조와 하우징 (해외는 거의 월세 시스템이므로)에 대한 지원도 좋은 편이다. 아, 학비 지원도 빼먹을 수 없다. 그래서 주재원이 되면 '가족이 행복한' 생활에서 가장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 아이가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나 해외 생활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는 등 부수적인 장점들은 이미 충분히 알 것이다.

(다만 여기에 적힌 지원 수준과 커버하는 영역은 회사마다 다를 것이다)


3. 해외에서 근무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일까?

해외 근무지는 한국의 큰 본사를 축소해서 옮겨 놓은 형태다. 연구소에서만 근무할 때는 만나기 어려웠던 다른 부서의 일과 동료들을 알게 된다는 장점도 크다. 사내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된다. 다른 부서의 이슈와 고민, 글로벌 판매 상황 등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생겨 업무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덤이다. 특히 연구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비슷한 일만 하는 연구원들과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 여기 오면 알지 못했을 회사의 고민과 새로운 기회.. 이런 부분들은 주재원이 되면 경험할 수 있는 큰 장점이다.




좋은 점이 있으니 단점에 대해서도 말해 본다 (연구직 관점).

많은 연구 자원 (인력과 장비, 돈)은 당연히 본사 연구소에 집중되어 있다. 글로벌 연구소의 현재 역할 상 직접 여기서 연구를 직접 수행하기 보다는 주로 전달자/메신저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회사마다 글로벌 연구직 운영에 대한 상황과 방침이 달라 일반화 시킬 수 없다). 많은 경우 한국에 있는 본사 결정을 요청해서 기다리는 입장이 된다. 주도적인 업무 운영에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 것은 브랜치 오피스, 연락 사무소 같은 입장이라면 어디나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언젠가 들었던 글로벌 소비재 회사의 사례는 좀 더 진보되어 있다. 그들도 싱가포르에 작은 연구소를 갖고 있는데 연구를 진행하게 되면 본사에서 인력이 파견되어 운영을 한다고 들었다. 기술을 발굴한 다음엔 본사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므로 역시 결정은 본사에 있지 않나 싶다.


글로벌 연구에 대한 흔한 오해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에 없는 거기서만 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연구 없어?'


기술의 발전이 워낙 빠르기도 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연구자들이 모이면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한국에서 하는 연구와 싱가포르에서 하는 연구의 주제가 다를 바 없다. 싱가포르가 바이오 산업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지속적으로 해온 결과, 해외 유명 석학들을 초빙해서 연구수준을 끌어올린 것은 맞다. 그러나 경험해 보니 어느 정도 광고를 잘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결국 이런 연구, 저런 기술 찾아서 한국에 소개를 해도 돌아오는 답변이 '한국에도 비슷한 연구자나 그룹이 있네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안할게요)'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몇번 쌓이니 선뜻 어떤 아이템이나 기술을 소개할 때 망설임이 우선이 된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을 돌파하는 방법은 설득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 명분을 잘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운 것도 주재원 생활에서 얻은 유용한 팁이다.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조력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두려고 노력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연구직으로서 경력의 단절이다. 회사에서 일하는데 무슨 경력 단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1년 단기로 처음 싱가포르 땅을 밟을 때는 적어도 나의 이력 관리에서 오히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물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새로운 팀이 생긴다거나 역할을 찾을 때), 한국에 있는 다른 대체 인력을 차출한다는 점이 살짝 부담으로 다가왔다. 굳이 해외로 발령낸 사람을 - 진짜 이 사람 아니면 안된다라는 동의가 없다면 - 다시 불러들일 명분이 없다.

그 기간이 이제 2년, 3년이 되다 보니 한국으로 복귀했을 과연 ' 자리는 어디일까' 고민하지 않을 없다.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경력도 많다. 싱가포르에서 일을 잘 꾸려서 돌아가는 것이 맞는지, 아예 없던 시간처럼 다 버리고 새로운 포지션을 탐색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없는 그 시간 동안 조직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고 역할은 조정되어 버렸다. 내 후배였던 사람들이 과거에 내가 하던 역할을 맡고 있다. 복귀하는 인력이 굴러온 돌처럼 보이는 것이다. 해외 주재원을 마치고 복귀한 선배들이 사내에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기에 더더욱 걱정이 앞선다.

우연히 알게 된 다른 한국 회사의 파견자 이야기가 생각 났다. 그 분이 파견될 때만 해도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연구소 임원이 있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임원이 본사로 발령 났다. 그러자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관심이 뚝 떨어지고 적당히 마무리 하고 돌아오는 것은 어떠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1년이든 그 이상의 시간이든 누군가의 소중한 연구 경력이 갑자기 망가질 수 있는 위험성은 분명 있다.


얼마 전 해외 연구소 주재원 자리 2개가 동시에 공모되었다. 궁금해서 나중에 물어보니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더라. 한국에서의 매너리즘에 빠진 근무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난 것일지 모른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지원자들 마다의 각양각색 이유를 모르면서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참 싫어하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그 얘기를 글로 남길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상상과 현실의 차이를 빨리 깨닫는 것이 현지에 적응해서 일을 꾸리는데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주재원으로 나온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라고 배수의 진을 치고 나온 팀장님의 말이 생각난다. 주재원이 회사에서 당신의 마지막 커리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난 그의 말이 갖는 의미에 공감한다. 보통 주재원은 경력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지 직원을 통한 업무 매니징에 관련된 일이 많다보니 경험 많은 리더급 인력이 일 처리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회사 입장에서 당연한 선택이다.

개인의 관점에서보면 어린 나이와 낮은 연차에서 주재원을 근무하고 다시 복귀하는 것이 경력 관리에는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연구직이라면 더더욱 주재원 이후의 경력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지 출처: https://awebstar.co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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