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하얀 피부를 만들려고 하지?

by nay

1.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여파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곳에서도 발생했다. 글로벌 화장품 회사들이 미백 스킨케어 제품의 이름, 브랜드 또는 마케팅에 사용하는 용어에서 whitening이라는 표현을 빼거나 대체하기로 한 것이다.

유니레버는 아름다움에 대한 보다 내적인 면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fair/fairness, white/whitening, light/lightening이라는 표현을 모든 제품의 패키징 및 고객 소통 용어에서 빼기로 했다. 미백 제품은 서양인들의 관심사에서는 많이 멀고, 동양인들에게 오랜 스킨케어 품목으로 대표적이다.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피부 미백 수요가 높은 대표 시장이 바로 인도와 중국 등이다.
로레알은 white나 fair와 관련된 표현을 glow나 even이라는 말로 서서히 대체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로레알이나 유니레버는 아시아 시장에서 많은 고객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그들의 미백 제품은 African이나 Caribbean 국가의 고객들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시작이나 개인적인 (범법자로서의) 배경, 또는 그로 인해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수많은 약탈 사건 등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여기서 논하고 싶지 않다. 그냥 동양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순수 동양인으로서 미국이나 유럽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유색 인종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무시는 분명 느껴봤다. 작게나마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ai-and-bias-1440x1050.jpg (이미지 출처 https://www.verdict.co.uk/ai-and-bias/)

여하튼 유색 인종에 대해서 미국의 일부 경찰이 보인 행동과 결과가 화장품 제조 판매업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시아 어느 곳에서도 피부 미백에 관련된 제품에 대한 어떤 형태의 구매 보이콧이나 시위를 본 사례는 없다 (내가 찾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시장을 주된 타겟으로 개발하거나 소통하는 제품임에도 이런 행보를 보인다는 것이 자못 놀랍다. 좋은 뜻으로는 피부색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 없음을 갖고자 하는 글로벌 회사의 발 빠른 행보이고, 다른 잣대를 놓고 바라보면 혹시라도 제품 판매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지레 겁먹은 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민감한 사안'에 대한 즉각적인 회사의 입장 발표와 움직임은 분명 배울 점이 있다. 어쩌면 글로벌 회사인 만큼 다양한 인종의 종사원들이 있기 때문에 더 유연한 사고가 내부적으로 요구되고 있지 않을까? 의사 결정을 이렇게 빨리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영진이 가진 넓은 사고의 폭, 사안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반영한다.


2. 여담 한 가지만.

입사했더니 맡은 일이 미백소재 개발 업무였다. 많은 한국 여성들의 관심이 피부가 밝고 하얗게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내 피부도 가무잡잡 한 까닭에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있던 영역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진행했고 결과가 좀 모여서 다음 해에 열린 미국의 색소 연구 학회에 참석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회사원으로서는 처음 참여하는, 게다가 혼자 갔던 학회라서 아직도 기억나는 일들이 많다. 미국에 도착한 뒤 domestic으로 연결된 비행 편을 한 번 더 갈아타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연결 편으로 짐이 오질 않아서 두 시간이 지나 호텔로 짐을 배달받은 일, 같이 갔던 모 학교 교수님과의 에피소드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당황시켰던 일은 작은 실수로 인해 만났던 어떤 이와의 대화였다.


갈라 디너가 있다고 해서 로비로 내려갔는데 마침 거의 같은 장소에서 다른 모임도 열리고 있었나 보다. 그걸 모르고 잘못된 곳에서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던 차에,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동양인이 있을 자리가 아니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을지도). 그는 흑인이었다.


'너 여기 무슨 일이니?'

'어 학회가 있어서 왔는데'

'무슨 학회인데'

'음.. PASPCR이라는 학회야. Pan American Society for Pigment Cell Research. 그런데 너는 알고 온 것 아니니?'

'여긴 그 모임 장소가 아니야. 아마 저쪽 일거야'

'(웁스.. 당황) 아 미안해. 내가 처음이라 헷갈렸나 봐. 그럼 가 볼게'

'Pigment 연구 모임이라고. 재미있네. 그런데 너는 무슨 일을 하니'

'(가는 사람은 왜 잡아) 어.. 그러니까, 사람의 피부를 하얗게 - 아마 whitening이라는 표현을 썼을 듯 - 만드는 연구를 하지'

'대체 왜? 왜 그런 일을 해?'

'사람들은 말이야, 자기 피부가 하얗게 보이고 싶어 해. 특히 동양인들은... '

원래 타고난 피부색 자체가 아름다운데
어째서 다른 피부색을 갖고 싶어 하는 거지?

'......?!'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성급히 자리를 떴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의 말을 잊지 않고 지내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기준에서 볼 수 없을 것인데 우리는 왜 스스로를 편견의 틀에 가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연구직 주재원 생활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