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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똑 부러지게 말하고 싶다.

by nay

우연히 페이스북 친구의 글을 읽었다.

내용은 수평조직에 관한 오해와 진실 정도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은 저것이다'라며 확실하게 답을 내리고 있었다. 내용이 무척 와 닿아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다 읽고 보니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링크해 둔 것이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 원저자를 알게 되었다. 덕분에 원저자가 타임라인에 올린 내용들을 더 많이 살펴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알고 있던 책의 저자다. 게다가 브런치를 통해 책을 발간한 케이스라서 은근 대단하고 반가웠다.


타임라인에는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 타임라인에 적힌 그의 어조는 단호하고 강력했다. 그런 단호박 같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자신감이 부럽게 느껴졌다. 다만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나에게는 조금 벅찬 느낌이랄까?


회사 일을 하다보면 확신에 찬 대답은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연구자로서 가져야 할 의심을 놓고 싶지 않다. 수많은 연구결과와 경험으로 결론을 내려도 확정적인 답을 하긴 여전히 어렵다. 통제된 조건에서 실험한 결과를 무작정 믿을 수는 없다. 데이터의 양이 무척 많다면 신뢰도가 올라간다. 실험을 반복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면 역시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모집단의 <진짜>는 모른다. 가설 검증에서 신뢰 구간을 정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 아니던가. 게다가 통계적 유의성을 위해 데이터를 쪼개고 합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값들이 버려질 수도 있다. 모집단에 대한 가설 검증 무용론이 아니라 그만큼 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confidence boost.jpg (이미지 출처: https://www2.cso.com.au/)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과학은 이론의 옳고 그름을 물질적 증거에만 의존하여 결정해야 한다.
과학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면 '모른다'고 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그것을 뒷받침할 물질적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leosp.png (이미지 출처: http://johnmcnamara.ie/)


회사 일이 어려운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다. 연구직은 과학을 기반으로 사고하는 것이 기본인데, 증거가 부족해서 모르는 것도 가끔은 아는 체 해야 하기 때문에 사고의 혼란이 온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증거가 불충분 해도 충분한 척, 아는 것 임에도 때로는 상황에 따라 모르는 척, 안될 것이 예상되지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을 혹자는 회사에서의 처세술이라고 부른다. 내게 있어서는 '규칙 위반' 같은 것이다.


하지만 회사 일이란 때론 밀어 부쳐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니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해야할까? 과학자의 양심을 팔 수 없지!라는 판단은 적합하지 않다. 앞서 규칙 위반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습관적인 방어기제의 작동은 아닐까 싶다. 항상 도망갈 구실을 만드는 것이다. 안되었을 때 욕먹기 싫으니까, 실패해서 다 뒤집어 쓰기 싫으니까, 누가 아니라고 하면 되받아 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일단 '밑밥' 깔고 보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양심 운운 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나의 성격은 글에서도 종종 묻어 나온다. 분명히 내 생각이 있지만 <~일 것이다> 라던가 <~라고 본다>와 같이 약간의 여지를 둔다. 이것은 이것이다, 이렇게 말 맺음을 못한다. 하루는 날 잡고 브런치에 있는 여러 작가들의 글을 살펴 보았다. 다들 분명한 자신의 색이 있다. 그리고 단호하다. '상사와의 갈등은 이렇게 풀면 됩니다', '기획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똑 부러지게 말하고 싶다. 내 생각이 분명함에도 선뜻 말하지 못하는 성격을 바꾸고 싶어진다.




넘버3라는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전체 대사를 줄였다)

여: 오빠, 나 사랑해?
남: 아니.. 난 너를 51프로 믿어.
여: 겨우?
남: 50프로 넘잖아! 야, 내가 어떤 놈을 49프로 이상 믿을 거 같아? 안 믿어

회사를 다녀 보니 51%의 자신감 또는 믿음을 100% 인 것처럼, 아니 스스로 100%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그 이상의 확신도 보여줘야 한다. 상사가, 동료가 전문가인 나에게 듣고 싶은 답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100%의 정답을 아는 사람도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기획안을 볼 때 늘 그런 생각을 해왔다. 아니, 이걸 이렇게 제안해도 되는건가?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은데. 그런데 그런 기획안이 통과되어 때로 <중요 과제>가 된다. 제안자는 정말 몰랐을까? 윗사람은 전혀 모른 채 수긍한 것일까?


인생이란 때로는 모른 척하고 작은 가능성에도 일단 가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늘 그래서는 곤란하지만 말이다. 어느 누구도 100%를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51%의 가능성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면 된다. 넘버3 대사처럼, 50프로는 넘었잖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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