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밸런타인데이에 아내에게 네스프레소 머신을 선물했다. 평소 네스프레소 매장을 지날 때마다 하나 살까 얘기를 하곤 했지만 늘 사지 않고 돌아섰다. 이유는 '우리는 커피 잘 안 마시는 사람들이니까'였다. 아내나 나는 남들처럼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입에 달고 살지 않는다. 기껏해야 하루 한 잔 정도 마시는 편이다. 우리 일상에 커피가 메인이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괜한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가자 하면서 매장을 나오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면서 급격히 떨어진 감 중에 하나가 구매 만족감과 지속성이다. 예전에는 뭐 하나 사려면 열심히 검색하고 가능한 예산 안에서 가장 좋은 옵션을 골라 긴 고민 끝에 사곤 했다. 그렇게 사들인 제품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는가.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뭘 사더라도 대충 고르고, 사고 난 후에도 그 감흥이 며칠 가지 못한다. 솔직히 이제는 복잡한 고민과 계산이 귀찮기도 하고 적당한 선에서 선택을 하고 싶은 까닭이다. 자기 효능감이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커피는 지독한 기호 식품이다. 기호 식품이란 "사람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향기나 맛 따위가 있어 즐기고 좋아하는 식품. 술, 담배, 차(茶), 커피 등이 있다"으로 정의한다(네이버 사전). 즉 며칠 또는 몇 달 마시지 않고 지내도 사는데 아무 영향이 없다. 평생을 커피란 것에 노출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서 아내나 나 모두 커피 애호가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더더욱 필요 없는 것을 괜한 충동으로 샀다가 후회할 것 같은 걱정을 한 것이다. 선물로 커피 머신을 사려고 할 때 과연 우리가 이걸 잘 쓸까 하는 고민으로 주문 버튼 누르기를 한참 망설였던 게 당연하다.
그런 합리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기억의 끝자락을 이리저리 조합해 보니 아마 밸런타인데이 며칠 전에 매장에 들러서 프로모션을 봤던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아내의 내심 아쉬워했던 표정이 유독 뇌리에 남았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온 커피 머신 하나는 꽤 쓸모 있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물의 당사자였던 아내는 부지런히 디카페인 캡슐을 검색해서 사 모았다. 어울리는 커피잔이 없다며 bodum 잔 세트도 구입했다. 아무 잔에나 마시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란다. 막상 그녀가 구입한 잔을 보니 잘 샀다 싶었다. 재택을 하면서 의도치 않게 관찰하게 되었는데 아내는 오후쯤 집안일에 힘들 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선물이 그녀에게 잠시 쉬는 시간을 내줄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다니 다행이다.
코로나 이후 재택을 하게 되면서 내게는 아침에 커피 한 잔이 루틴이 되었다. 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면 유독 커피가 당긴다. 입이 심심한 것이다. 그래서 주방에 가서 오늘은 뭘 마실 수 있나 살펴본다. 그날 맘에 드는 캡슐 하나를 툭 꺼내어 추출해서 자리에 다시 돌아오곤 한다. 난 이 캡슐이 참 맛있더라와 같은 취향은 아직 없다. 그저 갓 뽑아낸 캡슐 커피가 환기시켜주는 분위기를 즐긴다. 좁은 방 안의 냄새도 좋게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들이다. 아들이 집에 있을 때 커피 한 잔 내려서 마시려고 하면 '내가 할게' 병이 도진다. 우선 기계를 작동시키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올 초 유행했던 달고나 커피 이후에 잔뜩 라테아트에 관심을 보이더니 가끔씩 자기가 라테를 타 주겠다며 난리다. 그럴 때면 '여기 라테 한 잔이요'하고 주문하면 끝이다. 열심히 만들어서 뚝딱 내 앞에 가져다준다. 커피숍에서 만날 수 있는 퀄리티는 아니지만 무엇이 문제랴. 자식 키우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싶다.
지난 주말 Vivo city에 외식을 하러 갔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다.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 네스프레소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캡슐이 거의 다 떨어졌다며 좀 보러 가자고 한다. 역시 더 신난 사람은 아들이다.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다. 나는 많이 피곤했지만 말없이 따른다.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잔뜩인데 네스프레소 매장엔 사람이 거의 없다. 하긴 너무 많이 들어오지 못하게 인원수 조절도 하니까. 여유롭게 구경하는데 점원이 다가와 프로모션을 알려준다. 회원인지 확인하더니 10개 팩(총 100 캡슐)을 사면 사은품으로 유리잔과 받침 세트나 캡슐 디스펜서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많이 사야 하나 싶은데 아내의 말,
생각보다 많이 먹더라고.
사겠다는 얘기다. 게다가 사은품이 있다니 더 구매 욕구가 올라가나 보다. 10팩에 72 싱달러인데 사은품도 있으니 어차피 살 것이라면 좋은 딜이다. 두 개의 옵션 중에 무엇을 고를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들은 유리잔을, 아내는 디스펜서를 서로 주장했다. 갑자기 분위기는 토론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저 둘의 디베이트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긴 고민과 협의 끝에 유리잔과 받침 세트를 택했다. 디스펜서 역할을 하는 받침대를 이미 사기도 했거니와, 아들이 더 나서서 유리잔이 예쁘다며 이걸로 하자고 강력 주장한 까닭도 있다 (정작 집에 돌아와 검색하더니 디스펜서가 더 비싼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하는 아내).
다음 날 일요일 아침, 어제 사 온 새로운 커피 맛을 보고 싶었다. 아침 설거지를 거의 끝내고 아들에게 라테를 부탁했다. 지이이잉 하는 익숙한 추출 소리와 함께 진한 커피 향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희한하게 새로 산 커피 향은 유독 좋게 느껴진다. 캡슐로 먹으니 매번 같은 조건일 텐데 말이다.
사은품 잔에 담아 가져다준 라테 한 잔.
식사도 했겠다, 설거지도 끝났겠다, 식탁에 앉아 일요일 아침을 잠시 즐기기로 하였다.
한 입 마셔 보니 세상 마음이 좋아진다. 우유가 조금 많이 들어가 맛은 살짝 아쉽지만 부드럽게 마실 수 있어 편하다. 별 것도 아닌 커피 마시는 순간이 나를 즐겁게 해 주는구나. 아내 말처럼 '생각보다 많이' 마시게 된 우리 모습을 보며, 진즉에 하나 들여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거기 보면 집에 있는 물건들을 살피고, 욕구와 필요를 구분해서 욕구에 해당하는 것은 가급적 버리라고 조언한다. 정리를 부탁한 출연자들은 고심 끝에, 혹은 과감하게 오래되거나 잘 쓰지 않는 물건을 '욕구'의 상자 안에 넣는다. 물욕은 인간의 본성이다. 덜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쓰임을 다한 것 같은 물건도 추억을 회상하는 용도가 될 때가 있다. 한 출연자는 20년도 더 된 옷을 버리지 못했다. 알뜰해 보이면서도 저 정도면 미련이 아닐까 싶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욕구란 정말 소유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특정한 물건에 자아를 투영시켜 페르소나로 삼거나, 영광스러웠던 (또는 잊기 싫은) 과거에 대한 매개 수단일지 모른다.
커피 머신은 우리 가족에게 필요보다는 욕구였다. 사실 없어도 그만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진다. 그런데 막상 집에 두고 사용해 보니 욕구가 때로는 필요로 바뀔 수도 있구나 싶다. 'OOO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는 표현이 있다. 그렇게 바뀐 것이다.
욕구인 줄 알았던 것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야 과연 필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아마 쓸모와 사용에 따른 만족도 (구매에 따른 효능감?)가 크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정리의 여왕 곤도 마리에는 가슴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했다. 그것을 기준으로 그녀는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라고 말한다. 주방 한편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커피 머신을 보며 아직은 설렘이 남아 있으니 필요가 맞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사서 즐길 것을 그랬다는 생각도 들고, 오랜 고민의 숙성 끝에 들인 물건이라 더 유용하게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 것인가 추론해 본다.
그깟 커피 머신 하나 사놓고 별 생각을 다한다고 할 것 같아 이만 줄여야겠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물질보다 경험을 소비하면 행복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돌아보니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커피 머신에서 각자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홈 카페니 뭐니 그럴듯하게 이름 붙일 필요도 없다. 새삼 잘 샀다는 결론. 생활의 작은 여유가 커피 한 잔에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