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싱가포르의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말레이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적도에서 1도 위에 있는 작은 섬나라다. 그래서 일년 내내 덥고 습한 여름 날씨지만, 계절이 3개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덥고, 더 덥고, 가장 덥다’.
어릴 때 ‘사계절이 뚜렷해서 좋은 우리나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오죽하면 가요 가사 중에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란 표현까지 나왔을까. 머리가 좀 큰 이후엔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세뇌 교육 하듯이 강조하나 싶었다.
계절이 계속 바뀌면 번거로운 일이 많다. 계절마다 옷을 준비하고, 옷장을 정비해야 한다. 매 계절 준비해야 할 옷값도 만만치 않다. 겨울이 지나면 드라이 클리닝 하는 무겁고 부피 큰 외투는 어떻고. 그 뿐인가? 이불과 담요도 계절이 달라지면 바꿔야 한다. 꺼내고 넣고 보관하는 것도 일이다.
게다가 여름은 좀 덥고 겨울은 좀 추운가. 이 지랄맞을 만큼 변화무쌍한 날씨와 사계절이 우리네 급한 성격과 빨리빨리 문화 형성에 한 몫 했으리라 믿는다.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다 보니 사람들의 성격이 느긋해서는 안 되었으리라.
회사 일 때문에 오게 된 싱가포르. 일년 내내 계절의 변화가 없는 환경에 살아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을 발견했다. 살림살이가 제법 단출해진다. 여름 옷 외에 다른 계절 옷을 마련해 둘 필요가 거의 없다. 가끔 다른 나라로 여행 가려면 긴 옷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 외엔 말이다. 여름 옷은 부피도 작게 차지한다. 이불도 마찬가지다. 두꺼운 침구로 갈아 줄 필요조차 없이 충분히 일년을 보낼 수 있다.
꼭 계절 탓은 아니지만 있지만 동남아 특유의 느린 일 처리는 예상대로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하루 만에 뚝딱 되는 곳이 전세계 어디 있겠냐마는, 여긴 택배 하나 받으려면 최소 일주일은 기본이다. 처음엔 적응이 안되어 답답했는데 이젠 그러려니 한다. 결국 배송은 되니까.
언젠가 아내가 왜 사람들이 싱가포르에서 사는 것을 무료하고 지루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계절에 따른 풍경의 변화가 주는 감흥이 전혀 없기 때문이란다. 가만 듣고 보니 동의가 되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항상 한여름의 짙푸름이다. 여기에선 모두 늘 푸른 나무다. 지나가는 계절의 끝자락을 아쉬워할 명분조차 만들기 어렵다. 낙엽을 보며 ‘가을 타나 봐’와 같은 핑계로 딴짓 하기는 애초에 글렀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니 시간의 흐름도 놓치고 산다. 거짓말 조금 보태 오늘이나 내일이나 다를 것 없는 날씨와 계절 덕에 지금이 몇 월쯤 인가 가끔 확인을 할 때도 있다. 싫증을 잘 느끼지 못하는 성격 임에도 3년쯤 지내보니 변치 않는 여름 속에 박제된 기분이다.
한국은 같은 장소일지라도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이 새로움을 준다. 회사에 멋진 정원이 갖춰져 있는데 봄엔 벚꽃이 만개한다. 여름엔 푸른 풀밭이 펼쳐지고, 가을과 겨울엔 낙엽과 눈으로 덮인 언덕을 보며 일터라는 공간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르곤 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기분을 환기할 뿐 아니라, 다음에 올 변화를 상기시켜 몸과 마음을 준비 시킨다. 봄에 꽃을 보며 느끼는 설렘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다짐을 불러 일으켰다. 눈 내리는 겨울이 되면 한해를 돌아보는 아쉬움과 후회, 반성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따라 왔다. 아, 나는 비로소 일년의 시작과 끝을 계절의 변화에서 준비하고 마무리 해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깟 사계절이 뭐 그리 좋으냐고 삐죽거리던 내가, 이제는 그 계절을 몸과 마음으로 그리워 한다. 느끼고 싶다. 곧 한국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 온다. 아침 저녁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번뜩 차리게 만들고, 따뜻한 커피 한 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로 따스해지는 손. 그런 기분을 만끽하는 잔뜩 여문 가을이 보고 싶다. 추운 날씨, 포근하고 도톰한 이불 속에 몸을 뉘일 때 주는 편안함이 그립다. 가을 타고 싶다.
<월간 에세이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