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보다 숙제 같았던 이사

by nay

고요하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이 시간이 좋다. 방학 중인 아이는 학원에 있고 아내는 직장에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다. 우리 집 청소반장에게 청소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배터리만 가득하면 그는 집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집안 먼지를 모아서 자기 뱃속에 담아 놓는다. 군말 없이 일해주는 그가 고맙다. 윗집과 아랫집에 지금 이 시간 사람이 없는지, 있어도 조용조용 지내는 건지 다행스럽다. 그저 내 타이핑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귀국 이후 2주 동안의 격리, 2주 반 진행된 인테리어 공사, 의도치 않게 2번에 걸친 이사. 이삿짐과 별개로 각종 가구와 가전은 따로 배송되느라 기다림을 가져야 했던 또 다른 2주의 시간들. 처가에서 지내며 회사를 가고, 새 집을 오고 가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오는 이삿짐과 한국에 보관해 두었던 짐이 이틀의 차이를 두고 새 집에 도착했다. 원래는 같은 날 하려고 했는데 이사하기로 한 날, 강풍이 분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래서 사다리차를 써야 내릴 수 있는 한국 보관 짐을 가져올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더 잘된 일이었다. 아마 한날한시에 했다면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도무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이사는 살던 짐을 그대로 잘 포장해서 가져다가 이사 갈 집에 거의 그대로 풀어주고 정리까지 해주는 것이다만, 한국에 2년 동안 보관해 둔 이사는 말 그대로 포장만 해둔 이사였다. 주재원을 가기 전 급하게 집어넣어두었던 짐들이었기에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박스에 적힌 '안방', '옷방', '부엌 쪽 팬트리', 이런 단어들만이 힌트가 될 뿐이었다.


이사 전에 쌓여 있는 박스를 보며 수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지만 현실은 상상을 넘어서는 법. 그 많은 짐들을 오픈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자 안에 든 많은 것들이 이제 필요 없는 쓰레기였다. 입지 않는 옷은 왜 이리도 많은지, 보지도 않는 책은 뭐 귀하다고 꽁꽁 싸매고 다녔는지, 갖고 있지 않아도 될 액세서리를 그동안 버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물론 각자의 이야기와 과거가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그것들은 진실로 '욕망 덩어리'였다. 매일매일 쓰레기들을 모으고 버리면서 반성했다. 괜한 욕심으로 채우고 버리지 못했던 소유물, 아니 쓰레기를 꺼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나름 정리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었다.


"자기가 너무 잘 정리해 넣어둬서 그래"


짱박아(?) 두는 능력, 정리정돈의 기술도 괜한 것이었다.


솔직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나를 치워버린들 여전히 거실 가득하게 쌓인 박스들은 나를 절망시켰다. 박스를 열었다가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고 그냥 닫아버린 적도 많다. 박스 안에 든 물건들을 보며 추억할 여유는 사치였다. 정리하기가 싫고 두려웠다. 가져다 놓을 위치라도 명확하면 모르겠는데 새 집이다 보니 물건의 적합한 장소를 결정하는 것조차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새 집에 수납공간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넣어둘 곳이 없었다. 오히려 수납공간이 적은 것이 정말 필요한 것들을 골라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끝이 보이지 않던 버림과 청소의 시간의 지나갔다. 막연해도 하다 보면 그래도 치워지고 정리되는 것이 신기했다. 1라운드가 이삿짐 정리였다면 2라운드는 가전과 가구를 받는 또 다른 기다림의 시간. 10년 전 결혼할 때 이후 소파, 식탁, 온갖 가전을 사는 것이다 보니 신상을 살 수는 있었지만, 선택과 고민의 즐거움은 없었다. 새로 살림살이 장만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아우 좋겠어요'하는 부러움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즐기지 못했다. 아내 말마따나 가전이나 가구 살 때 이것저것 비교해 보고, 쇼룸도 가보고 뭘 살까 설렘을 가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제대로 구경조차 못하고 시간에 쫓기며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설 연휴의 시작 전, 마침내 커튼을 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 살 수 있는 장소로 새 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갖춰야 할 것을 다 갖추고 나니 비로소 겨우 이사라는 숙제를 마치게 되었달까.


그런 폭풍 같던 시간이 이제는 한낱 추억거리가 되어간다. 그래서 여유 있게 이렇게 글까지 쓸 수 있다니 지난 몇 주의 폭풍 같았던 시간이 무색하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이지만 욕망에 대해 반성했던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할 것이다. 혹시라도 다음에 이사하게 되면 그땐, 훨씬 더 가볍게 설렌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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