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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Oct 13. 2022

글쓰기는 나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테세우스는 저 유명한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로 돌아온다. 대단한 영웅이었던 만큼 아테네 인들은 테세우스의 배를 오랜 시간 보존하려고 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고 한다. 당시 기술의 수준이 그러했겠지.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한들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운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시점부터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과연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젠가 방송에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는 시간이 지나면 죽어 버리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나를 구성하는 세포가 전혀 달라진다. 하긴 피부 세포만 하더라도 턴오버 주기가 굉장히 빨라서 약 한 달 뒤면 표피 세포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철학적인 질문을 떠나서라도 생물학적으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같은 것일까 라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생물학을 배운 사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새롭게 생긴 세포도 (이론 상)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이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성질이 같을 뿐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해석을 할 여지는 있다. 


결이 조금 다르지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다. 강물은 계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에 바로 조금 전까지 나를 적셨던 강물은 지금의 것과 다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순식간에 그리고 속절없이 바뀌어 간다. 언젠가부터 하루의 시간은 간혹 더딘 적이 있었지만 부쩍 한 달, 일 년의 시간은 참말로 빠르다. 안 그래도 빠른 변화의 시간과 환경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의 방향은 어쩌면 명확하다.


평생 나는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물론 10대의 나와 20대, 30대, 그리고 현재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라는 것에 토를 달아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존재론적 고민을 해 볼 기회는 거의 없었기에 최근 읽고 들은 이 질문과 역설들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재미난 이야기들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본질이란 표현을 좋아한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질이란, 사물의 본디의 성질이나 모습이라고 되어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꽤 많은 경우 우리는 본질을 놓친다. 회사 일과 연구라는 직업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살게 되었다. 왜 하는 일인지, 정말 필요한 과업과 탐구인지에 대한 것을 꾸준히 질문하다 보면 새삼 ‘굳이 이런 것까지’라고 생각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질을 놓치고 주변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만 신경 쓰고 마는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아쉬웠다.


<그냥 하지 말라>(송길영 지음)에서 작가는 많은 일이 자동화되는 시대에 내가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 말한다.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는 그동안 자신의 존재를 직위나 관계로 풀어왔기 때문에 이런 변화와 챌린지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길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면 그저 40대의 아저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아파트 쓰레기 버리는 날이면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가 추리한 옷차림으로 분리수거하는 나를, 번듯한 회사에서 20여 년 가까이 일하며 썩 괜찮은 학교를 졸업한 박사라는 사실을 그 누가 알까(아니, 관심이나 있을까!).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관계의 힘이라는 무선 안테나가 커버하는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자연인으로서 나는 익명의 존재로 남기 쉽다. 


송길영 작가의 글을 보며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 본다. 사회적 인간이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남들에게 그리고 사회에 보이는 모습의 중요성이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행복할 수도 있지만 파티가 끝난 뒤의 공허함마저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 확인받고 싶어 한다. 개인화된 콘텐츠 시대가 도래한 것은 획일성과 효율성으로 성장해 온 시대의 종말이다. 직급의 안전망에서 벗어나 자기 가치, 셀프 브랜딩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각자의 삶이 중요해지고 개별 목소리가 갖는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때에 자신의 본질을 찾는 질문의 무게는 더해진다.


매번 글을 쓰면서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썼던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 당시의 내가 때론 기특하고, 어쩐지 부끄럽고, 문득문득 썩 괜찮아 보이고, 적잖이 애틋하다. 이 친구, 참 세상 복잡하게 사는구먼 싶다가 철들려면 멀었네 하는 에피소드를 만난다. 많은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로 채워져 가는 생물체로서 나의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지점에서, 남들은 모르는 (때론 몰랐으면 하는) 나를 스스로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그것들이 하나 둘 모여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이룬다. 적당히 사회화된 내가 아닌 본디의 나이다. 그게 어쩌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라고 거창하게 결론 내 본다. 언젠가 미래의 내가 기쁘게 발견하길 바라며 이렇게 글을 써서 2022년 10월의 모습을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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