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었던 팝콘을 살려내어 먹다가.

by nay

사다 놓은 지 며칠이나 지나서 이미 눅눅해질 대로 눅눅해진 팝콘. 오가며 몇 번을 그런 상태로 집어 먹었다. 특유의 고소한 맛은 있으나 식감이 별로라서 두어 번 입에 넣고 나면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갓 튀겨서 먹을 때가 제일 좋다. 오늘은 배가 고파 남은 것을 해치우고자 마음먹고 보니, 바삭함이 사라진 그것이 영 반갑지 않다. 하여 늦은 밤 에어프라이어를 가동했다. 180도의 열로 3-4분 돌린다. 멀리서도 고소한 냄새가 밀려온다. 더는 참지 않고 냉큼 가동을 멈추고 꺼내드니, 마치 처음 받아온 그날처럼 바삭바삭한 팝콘이 나타났다.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죽은 것도 살려낸다 - 흔히 에어프라이어를 쓰면 치킨도, 팝콘도 처음처럼 바사삭 소리를 내며 먹을 수 있기에 이런 말을 쓰곤 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크게 오해할 수도 있을, 사이비 종교의 한 퍼포먼스 현장을 묘사하는 듯한 표현이다. 사실 애초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사전적 의미의 죽음이란 단어는 생명체에 부여되는 기능적 손실만을 다루고 있으니 눅눅해지면 죽는다고 생각한 것은 철저히 나의 기준에서 정해 준 값이다. 바삭한 식감을 살아있는 것이라 칭하는 것도 그저 사람이 마음대로 정의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찌 사전적 정의로만 결정될 수 있겠나. 마땅히 그래야 할 최소한 조차 못하면 우리는 보통 ‘죽었다’고 표현하고 그에 공감한다. '법은 죽었다' 같은 말이 그러하다. 고로 눅눅해진 팝콘은 바삭함이라는 특징을 잃어버렸기에 감히 바이탈 사인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가 있었다. 거기 보면 흡혈귀는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간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고 슬퍼한다.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 영원의 저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 어렸을 적엔 그때의 아름다움이, 늙어서는 노년의 빛남이 각각 있는 법 아닐까. 그런 이유로 나는 현재의 삶을 사랑한다.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냐는 질문에는 항상 ‘아니요’이다. 지금의 내가 좋다.


고백하자면 난 80세 정도까지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나이 들면 생각이 분명 달라질 것이다, 늙으면 늙은 대로 하고 싶은 것이 많아져 오래 살고 싶을 것이다라고 누군가 핀잔을 주지 싶다. 그런 말이 틀린 것은 아니리라 동의하면서도, 내 생각은 여전히 80년 정도의 인생이라면 적당하지 싶다. 80세에 대한 기준 또한 마음대로인데, 인간으로서 그 정도 살았으면 지구라는 별에서 많은 것들을 적당히 누릴 만큼 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앞으로 10년, 20년 뒤의 우리 삶은 지금과 전혀 달라질 것이 분명하고 그때가 되면 볼 것과 할 것이 더 많아질 법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다 내 손으로 만져보고 내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그건 과한 욕심일 뿐이다. 적당한 삶을 살고 떠나는 것이 내 뒤에 올 후손들에게 바람직한 처신이라고 본다. 내가 바라는 건, 사막에서 사라져 버린 어린 왕자처럼 80살이 되면 어디 먼 별로 육신과 영혼이 소리 소문 없이 떠나는 것이다. 지우개 똥만큼의 흔적만 남기고 말이다. 하나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영생의 생명을 얻은 뱀파이어나, 언젠가는 자연스레 생명이 다 할 인간이나 자기 것이라고 삶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죽음이야 신의 소관이겠지만, 죽음에 대한 입장만큼은 인간의 소관이다’(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늦은 밤, 며칠에 걸쳐 공기 중 떠도는 수분을 조금씩 머금고 서서히 죽어가던 팝콘에게 나는 생명을 강제하였다. 그러나 죽은 팝콘을 억지로 살려낸 뒤 그걸 다시 먹어서 없애버리는 행위는 어쩐지 몹시 잔인하다. 내 너를 살려 냈으니 맛있게 먹어 위장 속으로 집어넣으리라. 바삭거리는 소리가 입안 가득 퍼지다 못해 뇌를 울리며 비로소 허기진 배를 채우는 야식의 도리를 다할 때, 에어프라이어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수분을 잃고 처음처럼 건조하고 바삭하게 되살아난 팝콘을 입에 넣으며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해봤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행, 경험, 그리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