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은 도시를 여행했다. 일본 여행에 어지간히 관심이 없는 경우라면 여행지 이름만 들어서는, 그런 곳이 있나요? 거기 가면 뭐가 있는데요? 하고 반문하기 딱 좋을 법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차를 타고 조금만 벗어나도 논밭의 풍경이 계속 나타나고 오래된 집들의 지붕이 눈에 띄는 그런 동네였다.
첫날 일정은 그동안의 여행치고 여유로워서 슬슬 걸으며 일본의 3대 공원 중 하나라는 리쓰린 공원을 구경하고 그다음은 근처에서 온천욕을 했다. 온천탕의 첫인상은 조금 웃겼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긴 의자 위에 앉아 몸을 말리는 어떤 할아버지의 등짝과 퍼진 엉덩이였기 때문이다. 목욕하는 곳이 원래 알몸을 서로 노출하는 곳이 맞긴 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의 날엉덩이가 보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일본의 온천이 그러하듯 그곳에도 노천탕이 있었다. 뜨거운 탕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어떤 탕은 따끈하기만 해서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아들과 함께 물속에 잠겨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끔은 차가운 바람에 어깨가 시렸지만 물 안에 푹 들어가면 바로 포근해졌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올 때면, 빛을 가리기 위해 내려둔 발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볕의 느낌도 근사했다. 그런 환경 덕분에 마음이 나른해졌다. 새벽부터 일어나 비행기를 타느라 생긴 몸의 피곤에서 오는 나른함인지, 여유로운 상황에서 풀어진 긴장인지 궁금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물속에서 노닐다가 시간이 되어 나왔다. 만남의 장소(?)에서 뽀송한 몸과 마음으로 아내를 기다리며 멍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내가 꿈꾸고 바라는 여행이 이런 것이었구나 깨닫는다.
보통의 여행 일정은 제한된 시간 안에 많은 미션을 하나씩 깨부수듯 진행되어 왔다. 한 군데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 여기서 몇 시 몇 분까지 관광을 하고, 언제 오는 버스를 타야 다음에 예약된 식당에서 식사 가능, 그다음은 야경을 위해 OO탑으로 이동. 이러다 보면 여행을 하는 것인지, 방문 스탬프를 찍고 가기 위함인지 모를 쫓김에 늘 분주했다. 일생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니 비싼 돈을 들이고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온 여행지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데 집중되었다. 유명한 관광 스폿을 가보면 왜 그런지 이해되고 오길 잘했다 싶긴 했지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더 많은 긴장감을 유지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여행이란,
자신을 찬찬히 돌아보고
나와 주변 사이의 간격을 메울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킨포크 트래블)
어떤 동네에서 또는 도시에서 유명하다는 장소를 가지 못했다고(또는 가지 않았다고) 그곳을 제대로 여행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그것은 여행자들이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다. 낯선 여행지를 방문하면서 나를 모르는 익명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상의 긴장을 내려놓는 것 자체만으로, 여행의 의미는 충분히 차고 넘칠 수 있다. 일상생활의 반대급부로 새로움을 체험하기 위한 목적성이 높은 여행도 있지만, 일상의 긴장과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을 음미하기 위한 것도 소중한 여행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정한 여행은 해외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 진정한 여행은 알지 못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킨포크 트래블 중, ‘진정한 여행이라는 신화’(다프네 데니스)’)
인용한 문구를 나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면 싱가포르에서 살았던 3년 동안이 딱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여행'을 원하는 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듬고 애쓰며 유지해야 할 일상이 있기에 짧은 일정 속에서 여행의 미덕을 찾아내야만 하는 우리는, 조금 다르게 여행을 바라보고 설계해 볼 필요가 있다. 동네 마을 사람들의 온천탕에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여행을 통해 우리는 낯선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갑자기 깨닫게 되는 기회, 일행을 기다리며 멍 때리는 시간마저도 소중함을 격하게 느끼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여행에 쉼을 넣어주는 것은 어떨까. 세상 번잡함이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이런 시골마을에서 비로소 바라던 여행의 이상향을 만났다.